어떤 사건의 계기는 문득, 계시처럼 온다. 손현 작가의 모터사이클로 유라시아 횡단 여행의 계기도 그랬던 것 같다. 사진 전시를 보고 떠올린 여행을 3년 준비해서 실행했다고 한다.
노르웨이 국립 관광 도로에 관한 전시는 이 여행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구체적인 구현 방식에 영감을 주었다. <모터사이클로 유라시아 / 손현 저> 중에서
스무 살 초반 2월에 친구 셋과 유럽 배낭여행을 갔었다. 당시 유행이던 배낭여행 신문기사를 잠깐 보고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떠들다가 진짜로 불쑥 떠나서 한 달 넘게 개고생을 했었다.
지금 영위하는 사업도 짧은 전화 한 통이 단초가 되어 홀로 오래 고민하다 아내 의견을 최종적으로 묻고 시작하게 되었다.
어디 그것뿐일까. 이런저런 인생의 결정과 갈림길이 계시 같지도 않은 작은 일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도서관 서고에서 책을 훑으면서 가슴 두근일 때 예감했다. 역시읽는 동안 자주 검색을 했다. 모터사이클, 바이크, 유라시아 횡단... 찾는 검색어들은 일관됐다.
지금 내 나이의 몸이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하찮아 보이게 78세에 바이크에 몸을 싣고 떠난 분도 있었고, 110cc 스쿠터로 시베리아 횡단에 도전한 여자분도 있었다. 50대, 60대에 도전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렇지, 장비와 나이는 상관이 없구나. 뜻과 준비만 있다면 뭔들 못하랴.
친구와 시장통에서 삶은백소라에 소주를 마시다가 책 이야기를 했다. 어쩌면 훌쩍 떠날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가끔 내가 이런 뜬금없는 소리를 하면 언제가 됐던 높은 확률로 저지른다는 사실을 아는 오랜 친구는 입으로 가져가던 술잔을 멈칫하며 나를 쳐다봤다. 화장실에 갔다가 자리로 돌아가며 바라본 친구는 식당 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다.
쿵하면 착이다. 같이 가까? 물었고, 그라까? 친구의 답이 시간차 없이 돌아왔다.
매일 브런치에 기록하고 책을 내자는 얘기부터 유튜브와 인스타 활용, 바이크가 낫냐 지프가 낫냐는 토론, 여행의주제와 슬로건, 경비, 기간, 계절까지 온갖 소재가 안주였다. 민폐인 줄 알면서도몸짓과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건배하는 횟수가 빠르게 느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둘 다 가슴이 뛰고 있었다. 어느새 10시. 코로나 영업 제한 시간. 택시 뒷자리 문을 닫는데, 꼭 가제이라고 다짐하듯 큰 소리로 말하는 친구의 상기된 얼굴이 보였다.
다음 날, 책 제목이 뭐냐는 친구 톡에 예스 24 손현 작가 책 링크로 답을주고 나는 검색으로 찾은 (절판된) 다른 책을 빌리러 도서관으로 갔다. 이완 맥그리거의 레알 바이크(제목 번역이 마음에 안 든다). 바이크 여정은 애플티브이에 다큐멘터리가 있다고 한다. 롱 웨이 라운드(런던-유라시아-알래스카-뉴욕), 롱 웨이 다운(유럽-아프리카-희망봉), 롱 웨이 업(남미 파타고니아-미국-캐나다) 3부작. 곧 보게 될 것 같다.
손 작가한테 인셉션 당한 기분. 씨앗은 이미 내 속에 뿌려진 것 같다. 아마도.
서른에 떠난 손 작가에 비해 나와 친구는 많이 늦은 걸까. 120, 140Km의 속도로 바람과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매일 200km, 500Km씩 달릴 수 있을까. 검색 결과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에라 모르겠다. 당장 내일 떠날 것도 아닌데. 걱정은 나중에 하자. 가면 가는 거지 뭐.
손 작가가 인용한 김대식 교수와 박민 기자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었다. 작가의 결심을 가속한 문장으로 보인다. 책의 인용문 보다 조금 길게 발췌했다.
김대식 : “세상에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세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태어난 순간 게임의 법칙이 이미 정해져 있었고 나는 내가 정하지도 않는 게임의 룰에 최적화되기 위해 노력을 한다. 결국 세상이 갑이고 우리는 세상에 맞춰 살아야 하는 을이다.
뇌과학에서 인생의 갑이 되는 방법은 지금 이 순간 ‘지금의 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10∼20년 후의 미래의 나’로서 ‘지금의 나’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게 돼 정보전달 속도를 높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집중과 선택을 통해 나중에 내가 기억할 인생에서 괴로운 것과 즐거운 것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 <'가장 창조적인 5% 인재는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최상' 박민 기자와 김대식 교수 인터뷰 기사> 중에서
추운 겨울에 웬 유럽이냐고 스물몇살의 나의 어린 친구들은 걱정이 늘어졌었다. 그들을 설득하려 나는 이런 취지의 말을 했었다.
여행이 안전하고 쾌적하면 당장은 편하고 좋겠지만 그게 기억에 남겠냐. 돈, 배낭, 여권도 잃어보고 밥도 굶어 보고 추운 데서 잠도 자보고 해야 평생 얘깃거리가 남지. 짜샤.
친구들은 듣고 보니 그렇네 하며 순진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겨울 파리에서, 로마에서, 베를린에서, 빈에서 우리는 정말 말이 씨가 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지만 아직도 만나면 그 겨울의 생고생여행 얘기를 한다. 몹시 추웠던 유럽 길바닥에서 서로 멱살 잡던 그 추억을.
마침 비슷한 시기에 뉴욕을 여행 중인 친구도 엽서에 이런 이야기를 적었다. 여행은 좋은 포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포도를 따 시간을 들여 잘 숙성시키면 일상 속에서 필요할 때 가끔 꺼내어 마실 수 있는 제법 괜찮은 와인이 되어 있을 거라고. <모터사이클로 유라시아 / 손현 저> 중에서
10년 후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무슨 말을 할까. 위험하다고, 참으라고 말릴까?
10년 후 어느 날 친구와 와인 한 잔을 하며 몸으로 밀며 통과한 시베리아 광야를 추억하면서 또 다른 딴짓거리를 궁리하고 있지 않을까.
카페 통창으로 환한 햇살이 드는 따뜻한 토요일 오후, 10년 후 미래의 내 눈으로 지금 고민하는 나의 일들을 살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