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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버거 Feb 27. 2022

기억의 보정

얼마 전부터 사진을 자주 찍는다. 사진을 잘 찍고 싶은 마음은 간헐적 충동이라서 배우려 애를 쓰지도, 좋은 사진을 얻으려 공을 들이지도 않았었다. 휴대폰 카메라 증거 보관용처럼 썼다. 불량 원자재, 부자재를 찍어서 보관하고 통보하는 일, 문서를 찍거나 캡처해서 팩스, 메일을 보내는 일 따위가 주용도였다.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모터사이클로 유라시아(손현 저)' 책은 내게 두 가지 남겼다.

코로나 시국 2년 차라는 시점과 다람쥐 쳇바퀴 같은 상황으로 인해 어디로든 떠나고 싶다는 마음을 짓던 차였다. 유라시아 횡단의 꿈을 꾸기 시작하게 된 게 첫 번째고, 지난 글에 그 과정을 썼다.

멀고 긴 여행은 기록으로 남겨훗날 포도주처럼 꺼내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 들었다. 물론 책을 내고 싶은 욕심도 있으니 좋은 사진은 필요하다. 이 글은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사진 찍기에 관한 글이다.


여태껏 사진을 찍으면 많은 경우 그대로 보관했다. 좀 꾸민다는 노력은 기껏해야 필터 기능을 켜서 한두 가지만 눌러 느낌을 바꿔보는 정도였다.

손 작가의 책은 여행기답게 사진이 아주 많다. 많기만 하다면 내가 자극을 받을 일이 없었을 테지만, 많은 사진이 작품 같다. 간결한 구도와 절제된 느낌이 좋다.

풍광에 압도되지 않아서 좋았고, 도시 사진은 클리셰에 메이지 않아서 좋았다. 자전거 사진 몇 장으로 그 도시의 속도를 느끼게 하고, 유럽 특유의 로마풍 돌길이 아래에 넓게 보이는 구도로 도시의 역사를 슬쩍 보여줘서 좋았다. 사진을 통해 그의 여정에 동행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사람은 눈으로 생각한다.


폰 카메라의 보정 기능을 찾았다. 별도 앱까지 깔진 않았다. 지난주 대전과 일산 KTX 출장길에서 의도적으로 사진을 찍고 기차와 역에서 보정을 해봤다.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선명해지고 따뜻해진다. 찍을 때의 의도도 보인다. 아직 더 익숙해져야겠지만, 지금 이 정도만으로도 기분은 좋다. 차차 나아지길 바란다.


사진은 기억의 기록이다. 순간을 바라보는 내 관점을 구도삼아 사각틀 안에 담는다.

보정은 각색이다. 내가 자주 쓰는 쓰는 말 중에 '기억은 각색이고 추억은 윤색'이 있다. 삭막한 겨울 산길을 찍어도 당시의 내 마음이 따뜻했다면 보정을 통해 반영한다. 내 기억이고 내 추억이니까.


만나고 나면 복기를 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냥 스치듯 지나고 곧 잊게 되는 사람이 훨씬 많지만 한 번 더 생각나고, 마음에 남길 이유를 주는 사람이 있다.

그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 본연의 모습 그대로 누군가를 기억에 담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라는 생각을 오래 했다.

카이사르는 말했다. 인간은 믿고 싶은 것만 본다고. 또 누구는 말했다. 사람은 그가 아는 것 이상을 볼 수 없다고. 사람은 편향과 한계를 가진다.


모습과 말로 저장된 무르고 짧은 순간의 기억을 불러내어 복기를 하고 장기 기억으로 바꿔 기록한다는 것은 필터보정 기능을 켜서 통과시키는 것과 같지 않을까. 각색과 윤색의 행위.

우리는 복기를 통해 그와 그녀가 내가 가지지 못한 무엇을 가졌다고 느끼고, 나와 비슷한 무엇을 가졌다고 가늠한다. 그 사람 삶의 아주 짧은 순간만 본 것일 텐데, 우리는 우리의 치우친 필터를 통해 그이를 사랑하게 되고 미워하게 된다. 시간이 흐른 후, 그이가 그런 사람이 맞다고 고마워하고, 아니라고 화를 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어제 낮에 앞산 산책을 하며 찍은 사진을 보정하면서 이런 생각했다.

내 눈에 이쁘도록, 내 기대의도에 맞게 조정을 해도, 나무와 흙과 그네는 아무런 뜻과 의도 없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 뿐일 텐데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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