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부터 한동안 멀리하던 경제경영서를 읽고 있다. 오래전에 봤던 책인데도 처음 읽는 것 같은, 맥도널드 창업자 레이 크록의 '사업을 한다는 것 (레이 크록 저/ 손정의, 야나이 다다시 해설 / 이영래 역 / 센시오)'
여러 번 출간과 복간이 반복됐던 책이고 나올 때마다 제목이 다르다. 책의 도입부, 야나이 다다시 (패스트리테일 유니클로 창업자)의 추천사 부분부터 밑줄 칠 문장이 눈이 띄기 시작한다. 그다음 장은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과 소뱅의 사외이사이기도 한 야나이 회장의 대담이다. 역시, 읽다가 눈을 들어 잠깐씩 먼산을 바라보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내용이 많다.
이런 류의 책에서 미문(美文)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책 끝을 접고 밑줄을 치는 건 저자의 통찰 때문이다. 지금 내게 간절히 필요한 것은 한두 문장으로 함축된 크록과 야나이, 손의 경험과 지혜다. 정신이 번쩍 드는 문장을 만나는 독서는 공부 같다. 교과서, 참고서를 읽으며 밑줄 치는 것과 비슷하다.
예전 힘들었던 몇 년 동안은 책이 동굴이었다. 몰아치는 비바람을 피하고 숨을 쉬기 위해 읽었다. 읽다가 나를 잡아끄는 문장을 만나면 책 끝을 접고 밑줄을 그었다. 눈 뜬 새벽에, 잠 못 든 밤에 노트에 옮겼다. 주문을 외듯, 부적을 쓰듯 필사를 했다. 그 문장들을 문신처럼 새겨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제발 그렇게 되라고, 최면 걸듯 노트에 각인했다.
당시 손이 자주 갔던 책은 역사서, 경제경영서였다. 그중에서도 성공한 기업가의 자서전 성격의 책이 많았다. 성취를 위해 달리는 사람에게 쉬운 삶은 드물다. 거의 다 개고생을 하고, 시궁창에 뒹굴고, 나락으로 떨어지고도 다시 일어난 사람들의 스토리. 유방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커널 샌더스가, 레이 크록이, 이나모리 가즈오가,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정주영이 포기하지 않고 떨쳐 일어난 삶을 보여주는 책들.
위안과 희망이 간절했다. 나도 그들처럼 터널을 빠져나가면 성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증거를 갈구했다.
지독한 편식이며 확증편향의 책 읽기였다.
좁고 어두운 방구석에서의 필사는, 필사적인 기도였다.
그 노트들은 내 사무실 책장 아랫단 구석에 먼지를 쓰고 가로로 포개져 있다. 여태 다시 펼쳐 볼 일은 없었다. 브런치 글에 다른 작가의 문장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그때 필사한 내용을 사용한 적은 적어도 내 기억엔 없다. 에세이에 갖다 쓸만한 내용이 없기도 하거니와 노트를 펼치는 행위가 그 시절의 봉인 해제로 여겨져서 두려웠던 것 같다. 혐오스러운 물건인양 방치하고 있었다.
(먼지 털고 찍었다)
브런치 북 쓰기(원고지 600매 쓰기)에 도전 중인 요즘은 에세이를 많이 본다. 기출문제 풀이집 보는 기분이 든다. 내용과 글이 좋아서 보지만,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잘 쓸 수 있나 참고하려는 마음도 있어서다.
대담집도 읽고. 단편 소설도 자주 읽으려 하고 있다. 역사, 경영, 인문서에서는 좀 멀어졌었다. 또 독서 균형이 무너진 건지도 모르겠다.
근자에 밑줄 친 문장들은 대체로 예쁘다. 레이 크록의 문장이 도끼라면, 에세이 작가들의 문장은 솜사탕 같다. "괜찮아요, 잘하고 있어요, 좀 쉬어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뭘 그리 잘못하셨겠어요.", 같은 문장들.
밀리의 서재 덕분에 밑줄도 긋지 않고 손가락으로 편하게 하이라이트 표시만 하는 경우도 많다. 필사까지 하면서 외우려거나 기억에 때려 박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이 좋은 표현과 아름다운 글이 그저 내게 스며들어 내 글이 좀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자주 마신다. 여름뿐 아니라 겨울에도 그렇다. 시원하고 차가운 게 좋다. 고기는 삼겹살을 좋아한다. 한 달에 두세 번 먹는 것 같다. 쌈 싸 먹는 걸 좋아해서다. 소고기와 쌈야채는 좋은 궁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취향이다.
며칠 전 커피숍에서 주문을 하다가 잘 보지 않던 메뉴 보드판에 눈이 갔다. 뜨거운 캐러멜 마키아또가 마시고 싶었다. 희한한 일이다. 물론 커피숍은 시원하지만, 창밖은 한여름 햇빛이 뜨겁게 작렬하고 있었는데도.
얼마 전 주말에 고기가 당기는 날이 있었다. 콕 집어 소 갈빗살이 생각났다. 무엇이 먹고 싶다고 이렇게 구체적으로 떠오를 때가 많지 않다.
쓸데는 없지만, 해석을 시도했다. 호모 나랜스답게.
따뜻한 커피는 카페인 플러스 휴식의 뜻으로, 소고기는 단백질 플러스 나를 돌보라는 뜻으로 흔치 않은 현상을 풀이했다.
지난봄부터 오늘까지, 몸이 고되지는 않았지만 머리를 쥐어짜고 돌파하는 과정을 몇 번 통과하면서 마음이 지쳤지 않을까 싶다. 계획과 실행은 심플한 프로세스로 보이지만, 최선과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면서 진행한다. 깜깜한 두개골에 갇힌 단순한 뇌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만 하는데도 감정적으로는 요동을 친다. 현실과 영화, 소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끝 모를 두려움, 또다시 겪을지도 모를 실패의 절망, 한없는 불안을 사실적으로 겪는다. 몇 달간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기진한 모양이다. 몸이 '나 좀 살려줘' 하는 것 같다.
육체는 생존을 위해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이미지와 감각으로 요구한다. 살기 위해선 밥과 고기도 먹어야 하지만 따끈한 단맛의 커피도 필요하다.
어떤 책에 끌리거나 특정 문장에 마음이 멈춰서, 표시를 하고 기억하려 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살기 위해서 난 지금 이게 필요해, 라는.
기도의 필사, 레이 크록의 냉정한 말, 따뜻한 샤워 물 같은 위안의 문장.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해선 밥도, 고기도, 커피도, 책도, 한 줄 문장도, 다 필요하다.
그러면서 살아간다.
작가들의 문장에 진 빚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