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은 공장엔 늘 라디오 소리가 난다. 작업 소음만 들리면 어색하다. 다른 방송을 듣다가도 9시가 되면 어김없이 여성시대로 채널을 바꾼다. 오늘 아침엔 양희은 DJ가 자신이 쓴 글을 읽으며 시작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월드컵 결승전 이야기였다. 아르헨티나 대 프랑스전. 2:2로 경기 종료, 연장전에서 3:3, 승부차기에서 아르헨티나 승리. 양희은이 주목한 건 연장전에서 프랑스가 넣은 동점골 장면이었다. 음바페가 찬 공이 아르헨티나의 골망을 출렁이고 승부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을 때 카메라에 잡힌 메시의 모습을 이야기했다. 침착하게 흘러내린 양말을 고쳐 신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가을부터 오늘까지 내년 계획을 생각하고 있다. 온통 마음이 거기에 가있다. 밥을 먹다가도 뭔가 생각나면 폰 메모장에 적는다. 자다 깬 새벽에도 메모를 한다. 안테나가 바짝 서 있는 상태다.
계획은 평가부터 시작한다. 단풍이 짙어질 무렵 돌아본 금년은 만족스러웠다. 작년에 계획했던 세 단계 중 마지막 계단을 완전히 오르지는 못했지만(시간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다) 구조조정이라는 목표는 대부분 충족했다. 꾸준히(?) 글쓰기, 원고지 600매 쓰기, 브런치 북 출간 공모전 응모도 했다. 납품 단가 조정이라는 터닦이 공사는 진통 끝에 잘 마무리해서 10월 결산부터는 엑셀 결산서가 예뻐졌다. 다른 무엇보다 뿌듯한 건 신제품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서다. 다가오는 내년은 도약과 확장이 키워드가 될 거란 생각이 마음 저 바닥에 깔려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마음이 흔쾌하지 않다.
지난 화요일에 일산 출장을 다녀왔다. 싣고 갈 장비가 있어 차를 몰고 갔다. 내려오는 길에 평택도 들르고 대전도 갈 생각이었다. ‘생각’이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가능하면 가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서다. 나이 탓 이런 거 싫어하지만 요즘은 운전을 길게 하면 나도 모르게 핸들을 잡고 졸기도 한다. 위험하다. 그날은 가고 오는 길에 눈까지 내렸다. 하행길 눈은 폭설이라 할 만했다. 평택 스킵, 대전 포기. 나는 이제 젊지 않다. 인정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 입 닥치고 받아들여야 하고 그 인식에 기반해서 출장 계획도 세워야 몸이 견딘다. 평소의 운동도 큰 소용은 없는 것 같다. 노화 속도를 좀 늦추는 정도 아닐까 한다.
도약, 확장. 맞다. 가능하다. 그러면 어디까지 갈 것인가, 무엇까지 이룰까를 결정해야 계획이 확정된다. 사업에 아니 인생에 완벽한 계획 같은 건 없다. 경험상 안다. 무수한 변수가 생길 것이고, 이를 악물고 통과해야 할 지점도 만날 것이고, 또 우울증이 올만큼 가슴 졸이며 결과를 기다려야 할 경우도 많을 것이다. 각오를 해야 한다. 각오할 결심을 해야 하는데, 선뜻 되지 않았다. 큰 결과를 위해서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뻔히 보이는 그 고생이 두려운 건가.
책을 읽었다. 손현 작가의 브런치 글을 보다가 만난 ‘유난한 도전’(정경화 저/북스톤)은 금융 앱 토스의 사사(社史)를 소설 형식으로 쓴 책이다. 필요한 책이 필요할 때 나를 찾아와 준 느낌이 들어 반갑게 읽었다. 밀리의 서재에서는 ‘천 원을 경영하라’(박정부 저/샘 앤 파커스)를 발견했다. 한때 납품했던 다이소의 박정부 회장이 쓴 자서전 같은 성장 스토리 책. 보약을 먹듯 읽었다. 마음을 뜨겁게 할 연료, 자극이 필요했다. 기대보다 약했다.
너는 간절한가.
나를 찾아온 책 두 권이 나에게 물었다. 답이 궁했다. 간절해야 할 상황 아닌가? 뭐라도 해야 할 상황, 지금 나로선 최선의 무기를 갖춘 상태인데 왜 이러고 있나.
양희은이 본 메시는 무표정했다고 한다. 화를 내지도, 땅을 치지도, 욕을 내뱉지도 않고 허리를 굽혀 양말을 고쳐 신고 다시 뛸 준비를 하더라고 했다. 다른 일을 하며 고작 몇 초 동안 들은 글 내용이 마음에 불을 붙일 줄 몰랐다. 그래, 내가 코로나 전까지 몇 년을 준비했던 그 일을 올해 해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