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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버거 Sep 04. 2023

꼭 해야만 하는 일

자체 브랜드 재출시 준비를 시작한 건 며칠 되지 않았다. 유명한 일본 브랜드의 디자인 관련 책을 보다가 덜컥 마음을 정했다. 사업이 엎어졌을 때 눈물을 머금고 PB를 접었으니, 리런칭을 하게 되면 얼추 십 년 만의 시장 진입이다.


상품 컨셉에 대한 모티브를 책에서 얻고서 머릿속으로 상품과 진열대 디자인을 계속 생각하면서도 정말 재출시를 해도 될까, 의구심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거의 십 년을 OEM만 하고 살았다. 그동안 경쟁 브랜드도 늘었을 테유통채널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의견과 조언이 필요했다. 십 년간, 반쯤 아웃사이더로 살아온 내가 옛 기억과 예전 정보 가지고 결정을 하면 위험할 수 있다.

실패하면 죽는다. 신중해야 한다.


도매업체 사장 한 명에게 전화를 했다. 나보다 세 살 어리고 아주 선한 사람이다. 몇 년 만의 내 인사를 사람 좋게 받아줬고 저녁에 술 한 잔 하자는 느닷없는 청에 흔쾌히 응했다.

비가 쏟아지는 밤, 이자카야 바에 앉았다. 근황 토크를 하며 생맥주 서너 잔을 마시고서 물었다.

-우리 회사 브랜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재출시를 할라캅니다. 내가 굳이 B사장께 찬성인지 반댄지 묻는다면, 어느 쪽입니까?

기습적인 내 질문에 답 대신 자기 술잔을 잠시 잡고 있다가 천천히 몇 모금 마셨다. 잔을 내리고도 몇 초간 말이 없었다.

답을 기다리며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도 뭐해서 나도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차로 B사장 단골 LP바로 가서 노래를 여러 곡 신청하고 원 없이 들었다.

바의 통창 밖에는 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며칠 후 곗날, 약속 시간보다 일찍 온 한 친구에게 내 브랜드 재출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다들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친구도 말없이 제 잔과 내 잔에 소주를 따르을 내밀었다. 가볍게 부딪히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말했다.

-그 세월 겪고도 니가 살아남았다는 걸 보여줘야지.


엊그제 폰 메모장 정리를 했다. 내가 쓰고도 못 알아먹겠는 쪼가리 메모들은 버렸다. 스크롤을 밑으로 내리다가 작년 12월 18일에 쓰다만 메모를 발견했다. 금년에 하고 싶은 일들을 1번부터 9번까지 쓴 메모였다. 1번이 자체 브랜드 재출시다. 메모장에 쓴 시간까지는 나오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밤에 어디선가 혼술을 하다가 쓰고 까먹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맥락도 두서도 기억도 없어서.


내 마음엔 이미 재출시가 들어 있었다. 책 읽다가 든, 느닷없는 결심이 아니었다.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과 '어떻게'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 않았을까.


내가 죽지 않고 아직 살아있으니, 꼭 해야만 하는 일.

둘의 답을 합치면 이쯤 되지 싶다.  

개운했다.


진입 방법을 궁리하다가도, 샘플을 만들다가도 뜻대로 생각이 풀리지 않거나 상품이 예상보다 못나게 나오면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회의(懷疑)했었다. 또 제발에 제가 걸려 자빠지는 건 아닐까 의심했었다.

이젠 믿어야겠다.

들뜨지 않는 나를.

차분히 내린 내 판단을.


언제라도,

어찌 돼도,

PB 리런칭은 하게 될 것 같다.

갓 블레스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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