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필버거 Sep 17. 2023

명진슈퍼

명진상회는 구멍가게다. 서너 평 크기의 매장이 있고 가게 안쪽 미닫이 문 너머로 살림집이 붙어 있는 구조.

상호도 슈퍼가 아닌 상회인데 나는 자꾸 슈퍼라고 부른다.


칠팔 년 전 처음 이 작은 '슈퍼'에 갔을 때, 도대체 여긴 뭐로 돈 버나? 했다.

너무 작고 구색도 빈약했다. 내가 찾는 담배도 없었다. 흔하게 찾는 종류인데 명진의 주 고객인 동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미국 담배라서 그렇다고 했다. 물론, 지금은 취급한다.


아침 산책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종종 들른다. 캔 커피를 주로 사 마신다.

외근을 하러 동네를 나고 들며 담배를 사고 콜라, 프렌치카페 돌체 모카도 산다.

이제는 거의 매일 가는 단골이 됐다.


출근길에도 자주 다. 담배만 살 때도 있지만 봄, 가을처럼 바깥이 좋은 날에는 가게 앞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레쓰비를 마시며 푸른 앞산에 눈을 주고서 10분, 15분 앉아 있을 때도 있다.


아침엔 주인아주머니 딸이 손주 둘을 차에 태우고 온다. 엄마는 출근을 하고, 아이 둘은 외할머니 밥을 먹고 등원 승합차를 탄다. 

유치원, 유아원생으로 보이는 손자, 손녀는 엄마차에서 내리며 큰 소리로 '안. 녕. 하. 세. 요' 인사를 한다. 슈퍼에 앉아있던 동네 할머니들, 아저씨들 모두 싱글벙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반긴다.


이웃 몇은 자다 일어난 복장으로 와서 두부며 콩나물 같은 것을 사간다. 돈을 내는 사람은 없다. 주인아주머니는 치부책에 적지도 않고 거기는 얼마요, 저 집은 얼마요, 하는 말로 배웅한다.   


두부를 배달하는 경차가 다녀가면 불로 막걸리 트럭이 와서 한가로이 물건을 내린다.

커피를 다 마시면 익숙한 아침 풍경을 뒤로하고 나는 차의 시동을 걸고 회사로 향한다.


아차, 계산을 안 했다. 당황하거나 차를 돌려 다시 가지는 다. 지나는 길에 자진납세 하면 되니까.




회사로 놀러 오는 친구는 정해져 있다. 많지도 않다.

친구가 공장 가까운  볼일이 있을 때면 전화가 온다.

-근처다. 한 잔 하까.

-좋지.


등산로 입구 상권은 식당들이 문을 일찍 열고 일찍 닫는다. 대여섯 시면 파장 분위기. 서너 정거장 거리에 술집과 식당이 몇 개 있지만, 나는 그냥 내가 편한 명진슈퍼로 오라고 한다.


슈퍼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측엔 싱크대가 있고 좌측엔 하늘색 낡은 테이블과 연한 연두색 의자 네 개가 있다.

그 테이블은 낮에는 동네 터줏대감인 할머니들 자리이며 저녁엔 할아버지라고 하기엔 쫌 애매한 초로의 아재들 음주 지정석이다.

가끔 이 동네로 오는 친구와 나는 가게 밖 파란 플라스틱 테이블에 주로 앉아 마신다.


맥주는 셀프다. 병보단 캔이 더 시원하다. 과학적 근거는 모른다. 단지 느낌일지라도 그러면 그걸 마셔야 한다. 캔을 따서 권하며 친구에게 안주는 뭐 먹겠냐고 묻는다.


수년 전 처음 명진 슈퍼에서 맥주를 마실 때가 생각난다.

-안주 뭐 됩니꺼. 물었다.

--가게에 있는 거 다됩니더. 푸근한 인상의 주인아주머니가 답했다.

-혹시 찌짐 같은 것도 됩니까? 아니면 두부김치라도. 다시 물었다.

아줌마는 가게 안쪽을 흘긋 보더니,

--오늘 두부가 다 팔려서 안 되겠고.... 파전은 돼요.

-파가 안 보이는데요?

--텃밭에 파 키워요.

-그라마 파전 그거 줘보이소.


잠시 사라졌던 아주머니가 흙 묻은 파 몇 개를 쥐고 나온다. 흙을 털고 물로 헹구며 가스레인지에 프라이팬을 얹고 불을 댕긴다.


--맛있게 드세요.

텃밭에서 갓 뽑아 구운 파전은 달았다.


저녁 삼아 먹은 파전 한 넙띠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진열대에 스팸이 보였다.

-저것도 안주로 파시겠네요. 물었다.

--그럼요. 계란 묻혀 꾸버드리까예?

-좋지요.


-우리, 얼마 나왔습니까.

맥주 값은 정해져 있다. 안주 가격이 궁금했다. 메뉴판 같은 게 없었으니까. 안주 소개, 주문이 모두 구두로 이뤄졌다.

--얼마 받으까예.

-하하하.

친구와 나는 술로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을 한참 하회하는 가격을 지불했던 기억만 있다. 액수는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이래도 돼요? 했었으니까.


라면이 땡길 때가 있다. 고민할 필요 없이 명진 슈퍼로 간다.

진열대에 있는 안성탕면을 들었다가, 진라면을 흘끗 보고 다시 오징어 짬뽕으로 눈이 간다.

오늘은 얼큰한 오짬이다. 한 봉지를 건네면 주인아주머니가 냉장고를 열어 남아있는 야채를 손에 잡히는 대로 넣고 마지막에 계란을 풀고 고춧가루 조금 뿌려서 신김치와 함께 내준다.

콩나물이 들어간 날도 있고 없는 날도 있다. 냉장고 사정에 달렸다. 복불복이다.

화력이 센 불도 아닌 일반 가스레인지에 끓이는데 집에서 끓인 라면과 왜 차이가 날까.

추운 날은 가게 안에서, 선선한 날은 가게 밖 테이블에서 먹는다.




편의점에 갈 일이 많다. 담배도 사고, 아이스 아메리카노, 도시락, 삼각김밥 등을 산다.

매장은 깨끗하고 온도는 사시사철 쾌적하다.

반듯하게 유니폼을 갖춰 입은 직원은 기계처럼 정해진 멘트를 한다.

흥정할 일도 없고 바가지 쓸 일도 없다.

외상은 언감생심.

깔끔하다.


편의점은 편리해서 편의점이다.

시끌벅적하고, 없는 것투성이고, 반갑든 말든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아야 담배 한 갑 겨우 살 수 있는 불편한 명진 슈퍼가 내겐 편의점이다.


이전 01화 돈까스는 희망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