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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버거 Jun 09. 2023

돈까스는 희망이었다

지방도시에서 '시내'는 도심을 뜻한다. 요즘은 대구도 사람 모이는 번화가가 여러 군데 있지만 내가 어릴 적엔 대구역 주변 향촌동 일대가 중심가였고 시내에서 만나자 하면 누구라도 바로 알아들었다. 우리 집도 대구시 경계 안에 있었지만, 옷을 사려해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해도 영화를 보려 해도 '시내'로 나가야만 했다.  


중학교 일 학년 때까지는 학교와 집이 멀었다. 버스를 두 번 타야 했고 '시내'에서 갈아타야 했다. 매일 시내를 나간 이다. 대구백화점과 함께 지역 쇼핑계를 양분했던 향촌동 동아백화점 본점 는 교동 시장이 있다. 튀김오뎅이 리어카 위에 산처럼 쌓여 있었고 그 옆엔 양념오뎅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빨간 국물에 꽂혀 있었다. 시장 골목 한가운데를 중앙선처럼 가르며 길게 줄지어 늘어선 리어카들 사이사이엔 빨간 고무 다라이와 스뎅 다라이 좌판에 납작 만두, 순대, 백소라, 파전, 감주(식혜)를 파는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이 점점이 균일하게 열 지어 앉아 있었다. 매일 뭐라도 사 먹었다. 정말 무쇠라도 소화시킬 나이였는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그 시장 오래된 상가건물 지하에 심해 돈까스가 있었다. 그 집이 싸고 맛있다는 소리를 들은 날, 열네 살 소년이던 나는 큰맘 먹고 단짝 친구와 계단을 내려갔다.

1,500원이었을 게다. 주문을 하고 미지근한 수프 한 접시를 다 먹으면, 두드려 얇게 편, 약간 짙은 갈색을 띤 돈까스가 커다란 접시에 담겨 나왔다. 밥을 바르듯 눌러 담은 작은 접시와 함께. 허겁지겁 먹고선 누가 보는지 주변을 흘끔거리고는 접시를 핥은 적도 있었다. 밥은 리필을 해줬던 걸로 기억한다. 쉰을 넘긴 듯 보였던 약간 구부정하고 호리 한 아저씨는 허기진 소년에게 관대했다. 14년 인생 최고의 돈까스 맛으로 기억에 새겼다.


심해 돈까스 (출처 네이버)


아이 셋을 업고 안삼십 대 젊은 우리 부부가 심해에 가는 건 큰 마음먹었을 때다. 혼이 쑥 나갈 만큼 분답게 설치는 머스마 꼬맹셋에게 돈까스를 무사히 먹이고 나면 우리 돈까스는 늘 식어서 꾸덕해져 있었지만 맛있었다. 물론 열네 살 그때 그 맛보단 조금 느끼해서 소스에 케쳡을 뿌려 먹었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애들 먹이느라 혼이 나간 아내 접시의 돈까스를 잘라주면, 지 배 부르다고 이제 뛰어 나가려고 버둥거리는 서너 살 막내 허리를 한 손으로 안은 아내가 홍조 띤 얼굴로 한 점씩 맛있게 먹었다.


심해돈까스는 도심의 이동에 따라 쇠락해진 향촌동을 떠나 새로이 북적이는 동성로로 옮겼었다. 이전 후 몇 번 갔는지는 모르겠다. 갈 때마다 옛날 그 맛이 아니네 어쩌네 했었지만 그래도 대구에선 최고였다.

그리고 어느 날 심해가 사라졌다. 아무리 검색해도, 누구에게 물어봐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 후 돈까스와 멀어졌다. 그 맛이 아니어서, 어디에서도 그 맛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게 벌써 십수 년 전이다.


밤에 티브이를 보다가 돈까스가 나오는 장면에서 문득 심해돈까스를 검색했고 한 블로거의 글을 발견했다. 경주에 있는 바람개비라는 작은 돈까스 집이 심해의 맛 그대로라는 포스팅이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라는 생각과 또 속는 것 아니야?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도 비눗방울 올라오듯 기대가 몽글몽글 피었다.


며칠을 별렀지만 경주 갈 일은 없었다. 어제 오후, 중요한 일 하나를 처리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하루만 더 묵혀 생각해 보기로 하고선 시간 여유가 생겼다.

엉? 돈까스 먹으러 경주까지?

경주 가자는 내 전화에 아내의 반응이 이랬다. 편도로 한 시간 반 이상 걸리니 그만도 하다. 그래도 돈까스를 먹을 때마다 심해 타령을 하는 나를 알기에 순순히 그러자고 했다.  


경주 바람개비 돈까스


가게는 생각보다 많이 작았다. 테이블 세 개로 이미 가득한 홀 구석에는 아직도 사용하는 것 같은 철가방 두 개가 보였다. 세 개의 테이블 중 두 개엔 다 먹은 돈까스 접시가 그대로 있었다. 한바탕 바빴나?


오후 6시. 초저녁.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돈까스, 생선까스, 함박, 메뉴 구성이 심해와 똑같다. 점점 커지는 기대. 주문을 받으러 온 선하고 순한 표정의 아주머니는 우리 또래, 그러니까 오십 초중반 같아 보였다. 대구에서 이거 물라꼬 이까지 왔으예, 아내가 말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지는 않은 듯 맛없으면 어쩌냐는 걱정을 흘리며 돈까스 두 개 맞지예 하며 주방으로 들어가는 아주머니. 곧 망치로 고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치이익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신뢰감도 커진다.


소고기 스프, 오뚜기(?)


튀기는 동안 수프가 나왔다. 요즘 돈까스 전문점은 옛날 경양식집처럼 수프를 주는 곳이 없다. 고기도 일본풍으로 두툼하고. 접시가 아닌 종지라서 그렇지, 소고기 수프를 주는 것도 반가웠다.

우리 앞에 놓인 하얗고 커다란 접시엔 예전 심해처럼 얇고 넓은, 갓 튀긴 갈색 돈까스가 담겨 있었다. 칼을 대자 사가각 소리가 경쾌했다. 진해 보이는 소스는 예상대로 약간 느끼해서 오히려 반가웠다. 아내는 말없이 먹기만 한다. 기대만큼은 아닌 건 나도 마찬가지. 좁은 실내에서 구시렁거리면 들릴 것 같아서 하진 않았다.

맛으로 저장된 기억은 소리나 냄새보다 강렬하다. 추억의 맛을 그리워하고 찾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왜 추억의 맛은 항상 기억보다 못할까, 생각하며 먹었다.


바람개비 돈까스, 외양은 심해 것과 똑같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이제는 젊지 않은 동갑내기 아내의 얼굴을 보았다. 외출 한번 려면 기저귀에, 갈아입힐 옷가지에, 장난감까지 바리바리 한 보따리 싸 짊어지고서야 차에 오를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빛나던 아내의 얼굴을 생각했다.


먹는 속도가 아내보다 빠른 나는 설거지도 필요 없을 만큼 깨끗이 비운 접시를 물끄러미 보다가 화장실로 갔다. 볼일을 보고 물을 내리고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보았다.

나이 든 내가 있었다.

한숨이 났고 여차하면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찾아 헤맨 맛은, 아무것도 해보지 않아서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열네 살 소년과 어쩌다 이룬 작은 성공의 잣대로 야심 차게 미래를 꿈꾸던 삼십 대 청년이 혀 끝으로 느끼던 희망의 맛었을까.

그때 그 맛이 그립다는 건 그 시절의 내가 그립다는 것일까.


먹은 돈까스는 미안함이 되어 배를 가득 채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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