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조수석에 앉자마자 둘째 혼쭐 좀 내라고 했다. 또 왜? 하는 내게, 아내는 평소답지 않게 다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들어보니 둘째가 혼 날 짓을 했다.
나는 늘 애들한테 너무 무르다는 핀잔을 듣는데, 이번엔 따끔하게 혼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녀석의 태도가 아내에게 엄마를 경시한다는 느낌을 갖게 했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럴 땐 망설임 없이 바로 아내 역성부터 들어야 한다. 나 아니면 어디다 분을 풀겠나. 일부러 소리를 높여 아내 편을 들었다. 이 노무 자슥이 선을 넘네!
그런데 애를 봐야 혼을 내든 쥐어박든 할 텐데, 이 녀석이 며칠 동안 눈에 띄질 않았다.
어제는 일찍 퇴근했다. 막내가 입대한 뒤로는 아내와 나, 둘이 밥을 먹는 일이 잦다. 연습이라 생각한다. 얼마 안 있으면 우리 둘만 남게 될 테니 익숙해져야 한다. 첫 애가 태어나기 전 우리 둘만 놀 때로 돌아갈 준비를 하자고 아내에게 자주 말한다.
운전을 하며 저녁은 뭐를 먹나 생각하다가 며칠 전 마트에서 사서 냉장고에 넣어 둔 생닭이 생각났다. 아내에게 간장찜닭 어떻냐고 문자를 했고 좋다는 답문자를 받았다.
유튜버가 시키는 대로 닭을 푸르르 씻듯 삶아내고, 일차 양념을 하고 가스불을 댕겼다. 보글보글 끓을 때 아내에게 간을 보라고 하고 설탕과 간장을 추가했다. 미각이 약한 내 혀는 믿지 못한다.
둘이 밥을 먹을 땐 주로 거실에서 먹는다. 반주로 나는 소주, 아내는 캔맥주를 땄다. 볼리비아를 돌아다니는 무대포 기안 84를 보며 우리 애들은 우째 저런 패기도 없냐는 등의 얘기를 하며 밥을 먹고 치우는데 둘째가 들어왔다. 꾸벅하고 제 방으로 들어가는 둘째를 불러 앉혔다.
너 인마, 요새 뭐 하고 다니냐로 시작해서 엊그제 일은 어찌 된 거냐, 도대체 엄마가 얼마나 니 놈 안중에 없으면 그런 행동을 했냐고 퍼부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잠자코 있다. 좀체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아빠가 언성을 높이니 당황한 듯했다. 잘못했다는 말을 들었고, 한 번만 더 그러면 다 컸다고 말로만 하지 않을 거란 엄포로 마무리했다. 아내도 옆에서 이런저런 말을 보태며 화를 풀어냈다.
자식 혼내고 마음 편한 부모 있을까. 과했나 생각하며 밖으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저만치서 집 밖으로 나가는 풀 죽은(?) 둘째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너무 했나?
-아이다. 잘했다. 더 혼내도 된다. 애들이 뭔 상전이가.
휴대폰이 울렸다.
-아빠, 죄송해요. 저 지금 농구하러 가요.
야단을 맞고서 밤에 나가지만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이렸다.
-알았다. 조심해서 다니고.
그래도 기본은 돼있네, 생각했다.
세 아이 어릴 때 몸 딱 붙여 키워서 그런 것 같다고 혼자 약간 흐뭇해했다.
또 일찍 일어났다. 출근해서 메일을 읽고 답장을 쓰는데 휴대폰에 알림이 떴다. 네이버 클라우드 마이박스에서 00년 전 사진으로 추억을 감상해 보란다. '4년 전', '10년 전'처럼 랜덤으로 이런 알림이 가끔 온다.
터치를 했더니, 세 꼬맹이 사진이 주르륵 뜬다.
아, 이게 대체 몇 년 전이야.
왼쪽부터 첫째, 둘째 그리고 막내다. 큰애가 대여섯 살 쯤 때였다.
하던 일은 제쳐두고 한 장 한 장 확대하며 보았다.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눈시울이 뻐근했다. 아, 이게 뭔 조화람.
강원도 어디쯤에서 신이 난 아이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빛이 나고 있었다. 그 빛을 받은 나와 아내도 반짝였다. 다섯 식구가 가족이란 이름으로 빛나던 시절. 나도 아내도 빛나는 젊음이었던 그때, 그 겨울.
명치가 아렸다.
점심 무렵엔 브런치 알림이 떴다. 처음 보는 필명의 브런치 작가가 내 글에 라이킷을 눌렀단다. 한참 전 글인데, 어찌 찾아 읽었을까. 들어간 김에 나도 내가 쓴 그 글을 읽었다. 고민하고 견디고 분발하고 가끔 뿌듯했을 그즈음의 내가 보였다. 희미하게나마 빛이 난다는 생각을 했다. 내 삶을 위해, 내 가족의 더 넓은 선택지를 위해 애를 쓰고 있던 내 모습. 십수 년 전처럼 젊지는 않아도, 나는 약하나마 여전히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 속 꼬마들이 먼 훗날 아빠의 이 글을 발견하고 읽으며 자신들이 빛났음을, 여전히 빛나고 있음을, 아빠도 엄마도 저희의 빛으로 반짝이며 저희를 키우며 행복했음을 깨달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