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전날 도착했어야 할 자재가 오지 않았다. 단골 경동화물 소장은 실실 웃으며 큰 명절에 그럴 수 있는 일인 거 잘 아시지 않냐며 양해를 구했다. 설, 추석이 낀 달은 뭐라도 꼭 일이 터진다. 꼼짝없이 연휴 4일은 놀게 생겼는데 큰일이란 이성과 싫지 않다는 감성이 동시에 작동했다.
연휴 동안 해가 떠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 내 방과 커피숍에서 혼자 지냈다.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이고 OTT를 봤다.
명절이 이리 한가해진 건 몇 년 되지 않았다. 그전엔 나도 차례를 지냈고 인사를 분주히 다녔었다.
어느 날 문득, 그만하고 싶었다. 명절 이게 뭐라고. 그래 그만하자. 그리고 그만뒀다. 아내도 동의했고 아이들은 그러려니 한다. 그 내막은, 말하자면 긴데 제삼자에겐 부질없는 내용이라 생략한다.
뭐, 또, 언젠가 내키면 쓰겠지만.
아무튼, 아무 일 없는 나흘을 보냈다.
놀면 불안한 인간이라 엑셀과 워드를 열기도 했다. 일의 영역에 속하는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으로 그랬다.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커서만 깜빡깜빡. 창의력, 추진력의 원천인 데드라인이 없어서 그런가. 마음이 급하지 않은 건 아니다. 대체 휴일까지 지나면 25일부터 업무가 시작되고 납기 마감은 31일이니 4일 오롯이 쉰 것은 야간작업 같은 걸로 메워야 할 게 뻔하다. 그런들 어쩌랴, 뭐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걸.
혼자 밥을 먹는 것, 혼자 영화를 보는 것, 혼자 드라마를 보는 것, 혼자 산에 오르는 것, 혼자 자전거 라이딩을 하는 것, 혼자 공연을 보러 가는 것, 혼자 술을 마시는 것, 혼자 여행을 가는 것,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 혼자 옷을 사러 가는 것, 혼자 서점을 가는 것, 혼자 장을 보러 가는 것.
일상이다. 특별하다거나 유별나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한다. 아 참, 혼자 놀다 보면 그건 확실히 느낄 수가 있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 흥미만 있다는 말.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확연히 느낀다. 편할 때가 많지만 가끔은 왜 혼자 이러고 있나 싶을 때도 있긴 있다.
외톨이 성향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주변에 사람이 없을까. 그건 아닌데.
자발적 외톨이, 간헐적 외톨이 정도지 싶다. 그냥, 성향이다. 굳이 나누자면 후천적 성향에 가깝다.
혼자 논지 사흘 째 날은 누군가가 소극적으로 필요하다고 느꼈다.
거리감 있는 누군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누군가. 적극적으로 내 말을 청하지도, 내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을 누군가. 내가 뭐라 뭐라 지껄여도 기억하지 않을 누군가가.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는 여자 사람 친구가 몇 있는데 그중 한 명이 동거인과 같이 냉동삼겹살 집을 한다. 무료한 연휴 중간에 들러서 밥과 반주를 홀짝이기 안성맞춤인 곳이다. 손님 없으면 고기 구워 줄테고, 뭐라고 몇 마디 하면 최소한의 리액션은 할 테니 티브이보다는 나을 테고, 작으나마 매상 올려주니 참새 눈물만큼은 고마워할 테고.
톡을 했더니, 쉴까 말까 하고 있었는데 잘 됐다며 얼른 오란다. 고맙네, 짜슥. 그런데 이건 혼밥, 혼술일까.
길어 보이더만, 지나고 보니 나흘이 순식간에 지났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는데 몸과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맑았다. 만사가 긍정적으로 느껴져서 좋았다.
가볍게 출근해서 메일을 쓰고 제안서와 발주서를 만들며 오전을 보냈다.
연휴 중에 했으면 좋았을 일들이다. 닥치니까 한다. 그것도 아주 잘. 진도가 쭉쭉 나간다.
제목에서 길티를 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