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7월이었다. 폭염(暴炎)이란 단어에 왜 사납고 난폭하단 뜻의 한자가 붙었는지 피부로 새기는 날이 이어졌다. 폭력배 주먹질 같은 햇살에 두들겨 맞아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만들고 부수고 새로 만들다 생긴 지체를 생각하면 더위는 극복의 대상이지 피할 일이 아니었다.
2호 샵인샵은 할인점 안에 자리 잡은 (대략) 백 평짜리 문구점이다. 약간 뚱뚱한 직사각형 매장의 삼분의 이는 전형적인 20세기 문구점 모습이고, 나머지 삼분의 일 정도는 아동 서적과 땡처리 책들이 꽂힌 서가가 쭉 들어서있다. 설득의 힘이 약했던지, 탐냈던 1/3을 다 바꾸지는 못하고 두 면이 만나는 구석자리 세 평 정도만 우선 사용하기로 했다. 판매가 괜찮으면 1/3 전체를 대책회의로 바꾼다는 합의도 했다.
몇 번을 갔는지 모르겠다. 사이즈는 벌써 다 쟀지만, 갈 때마다 머릿속 그림이 달라졌다. 나무색을 밝게 했다가 어둡게도 그려보고, 테이블을 넣다 뺏다 키웠다 줄였다 해보기도 했다. 예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을 가차 없이 흐르는 시간과 바꾸고 있었다.
기억 자로 꺾인 벽면 중 긴 쪽은 삼 미터가 넘었다. 대책회의 운영진으로도 활동하는 친한 동생의 나무 공방에서 반조립 상태로 만들고, 내 카니발에 세 번 나눠 실어 나르기로 했다.
카니발 트렁크 문을 열고 조수석 쪽 앞뒤 시트를 다 눕히고 대시보드에 걸쳐 전면유리에 닿을 정도로 밀어 넣으니 겨우 들어간다. 뭐 이래 많노. 차곡차곡 하나씩 쌓으며 실었다. 어, 큰일이다. 우측 사이드 미러가 안 보인다. 동생하고 잠시 고민하다가 에라, 그냥 가보자 했다. 어라, 사람은 어디 타지? 아, 운전석 뒷자리에 타면 되는구나. 둘 다 바보다. 더위 탓이거나.
마트 적재하차장에 주차를 하고 대형 카트를 빌려 책장을 싣고 화물 엘리베이터로 2층까지 날랐다. 대여섯 번 오르락거렸다. 땀을 하도 흘려서 목이 탔다. 이제 조립만 하면 오늘 일은 끝난다. 한 칸씩 올려 쌓으며 전동 드릴로 나사를 박았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문구점에 들어오던 손님들이 흘끔흘끔 우리를 본다. 몰골이 말이 아니라서 보나? 여기 뭐해요? 묻는 사람도 있다. 중고책 판매 책장 만듭니다. 답하며 손을 움직였다.
가지고 온 (대책 회원들의) 중고책을 꽂았다. 가죽 다이어리와 노트, 메모지도 사이사이에 배치했다. 동촌커피는 짙은 회색 벽과 조화를 생각해서 어두운 톤의 원목으로 서가를 만들었는데, 이곳은 조명도 밝고 벽도 흰색이라서 밝은 원목을 썼다. 파는 책이냐, 구경해도 되냐, 판매는 언제부터 하냐, 묻는 사람이 점점 늘어난다. 이거 되는 일인데, 속으로 웃었다. 다음 날, 2차까지 마무리했다. 이제 진열대 겸 책을 읽고 앉아 쉴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만 만들어 들이면 마무리된다.
2010년대까지 소매점은 '크고, 다양하게'의 경쟁이었다. 문구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종다양한 구색을 위해 생활용품, 공구, 액세서리, 패션 소품까지 취급 상품군을 확장했다. 취급품이 느는 만큼 매장도 점점 커지는 추세였다. 학교 앞 작은 문방구들은 2000년대 들어 이미 줄어들고 있었으니, 납품할 곳을 잃어가고 있던 문구 도매업체들은 경쟁적으로 대형 소매 매장을 열었다. 자기 자본으로 하는 업체도 있고, 외부 자금을 조달해서 땅을 사고 건물을 올린 업체도 많았다.
돌아보면, 2010년대까지만 해도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공존 가능하다고 보는 분위기였다. 각각의 영역이 있을 거란 희망 섞인 관측이었다. 이자 부담이 다소 생기더라도 확장을 해서 매출을 늘리겠다는 생각은 합리적인 판단일 뿐 전혀 무리수라고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느닷없는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내가 본 매거진 글에 주장하는 대로, 코로나로 인한 변화는 산업화 혁명과 정보화 혁명에 버금가는 혁명적인 것이다. 코로나 전과 후는 19세기 조선과 21세기 대한민국처럼 다르다. 사람들이 일하고, 소비하고, 구매하고, 노는 방식이 급변해 버렸다. 평상시라면 최소 10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나도 저항이 생길 법한 변화가 그 2년에 압축해서 그것도 강제적으로 생겼다.
여기 이 문구점도 모회사는 도매상이다. 십수 년 전에 대형화 경쟁에 뛰어들었다가 코로나를 거치면서 재무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오래 잘 버텨왔기에 이번 여름 비수기 보릿고개도 그럭저럭 넘길 줄 알았다.
마지막 설치를 하려던 날, 잠시 홀드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짚히는 구석이 있어서 며칠 후 가보니 문구점만 폐쇄돼 있었다.
업체 사장과 커피를 마셨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라고, 나도 그 지옥 겪었지만 이렇게 살아 있지 않냐는 말을 건넸다. 힘내라고 한다고 힘이 날리는 없겠지만, 잘 헤쳐나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나도 사람인지라, 조금만 더 버텨줬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운 내 입장의 생각도 했다.
여기는 이 상태로 대기모드로 전환하면 된다. 문제는 3호 샵인샵이다. 이곳 다음에 진행하기로 한 대구 도심의 문구점의 대표는 돌다리도 두드리고 또 두드리는 스타일이다. 마트 문구점 판매 상황을 보고 진행하기로 했었다. 여기 이렇게 됐다고 대뜸 밀고 들어가기는 어렵다.
샵인샵은 일단 스톱이다.
난감하다.
째깍째깍 시간은 쉼 없이 흐른다.
어째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