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촌커피
통창 밖 쇄석 깔린 주차장을 보고 있었다. 따순 커피숍 안에서 바라본 바깥공기는 손톱으로 툭치면 쨍하고 금이 갈 듯 맑았다. 겨울이 한창이던 2월의 어느 날이었다. 커피숍 사장이 양손으로 머그컵을 감싸 쥐고 예의 그 씩씩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털썩 앉았다.
-왜 이래 오랜만에 왔어요.
-그러게 말이요. 여전히 손님 많제?
-오후에 많지. 주말엔 바쁘고 글쵸
짧은 인사말이 오갔다. 생글생글 웃는 눈을 보며, 웃상들은 참 좋겠다고 말했다. 사장 눈이 더 휘었다.
나 보다 대여섯 살 작은 모씨 성을 가진 여자 사장이다. 대책회의 초창기 멤버이기도 하다. 아들하고 같이 운영하는 커피숍은 건평만 팔십 평인가 구십 평이라는데 치장을 최소화한 미니멀한 공간 디자인이 깔끔하고 시원하다. 회색 징크 패널 외관에 천장고(天障高)도 높아 세련미를 물씬 풍기는 건물이다. 자체 주차장도 넓은데 바로 옆에 동촌유원지 공영주차장까지 있다. 다 감안하고 지었겠지만, 주차 공간이 고객 서비스인 시대에 복 받은 입지다.
자리 잡는 데 3년 걸렸다고 했다. 동촌 유원지에서 비(非) 브랜드 커피숍, 그러니까 스타벅스, 투썸 플레이스, 폴 바셋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 커피숍 중에 살아남은 가게는 동촌(東村) 커피가 유일하다는 말도 했다.
-다 사장 때문이다.
-내가, 왜!
-가게 잘 되는 게 사장 탓이라고.
지능도, 얼굴도, 키도 유전자의 랜덤이다. 노력으로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은 작다. 사장은 훤칠한 외관에 밝은 표정의 미인이다. 거기다 누구에게나 환하게 웃으며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는 성품은 막히거나 굽은 구석이 없다. 인생에 어두운 구간이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아주 짧게 지나간 이들에게 볼 수 있는 분위기다. 타고난 복에 성실을 더한 사람.
든 자리보다 난 자리에서 그 사람의 크기를 알 수 있는 법이다. 가끔 동촌 커피에 갈 때, 사장이 없는 경우가 있다. 매장의 온기와 창으로 드는 햇살 조도조차 다르게 느껴질 만큼 존재감이 크다. 백 종원 대표의 장사 어록 중에 '사장의 알은체'란 말이 있다. 잘난 체 말고. 손님이 오면 오랜만이라던가, 오늘은 다른 걸 주문하시네요 같이 손님을 기억해 주는 것이 장사의 ABC라고 했는데, 자기를 알아주는 가게에 정이 가는 건 인지상정이다. 그렇다면 동촌 커피 사장 태도는 백 점 만점에 백이십 점이다.
-인테리어의 정점은 사장이고 사람이데이.
-그게 뭔 소리고?
-사장의 태도가 이 매장의 용 눈동자란 말이다. 사장 빠지면 이 가게는 앙꼬 빠진 빵이란 뜻.
-칭찬 이제?
-그럼, 그럼.
작정하고 온 것도 아닌데, 커피숍에 책을 넣으면 어떻겠냐는 말이 나왔다. 이 분위기에, 모 사장이 만든 활력에 내가 구상하는 대책회의 샵인샵을 더하면 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였다.
-책을 예쁘게 진열해 보면 어떨까. 팔릴까 말까 걱정은 안 해도 되고. 고상한 인테리어라고 생각하면 어떻겠수?
-그라지요 뭐.
엉? 말도 덜 끝났는데, 흔쾌하다. 너무 시원스레 동의해서 '정말?'이라고 다시 물었을 만큼.
카운터 옆으로 여덟 계단 정도 올라가면 열댓 평쯤 되는 2층이 있다. 트였으나 독립된 느낌의 공간. 거기에 세팅을 하기로 해놓고 실제 입점은 6월에 하게 된다.
겨울이 가고 봄도 떠난 6월, 드디어 실행하기로 했다. 공황증상이 여전했지만 더 미루면 입점을 약속한 업체들 마음이 변할지도 몰랐다. 어디부터 들어갈까. 최종적으로 남은 선택지는 100평짜리 마트 내 대형문구점과 동촌커피 두 군데였다. 판매를 생각하면 문구점이 맞는데, 나는 동촌커피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실적이 아니라 '브로셔'가 필요해서였다. 샵인샵을 계속 확대하기 위해서는 예쁜 실례(實例) 사진이 먼저라고 판단한 거다. 백문이 불여 일견. 사람은 눈으로 생각하니까. 또한 처음이라 좀 헤매더라도 봐줄 것 같았고, 성격 좋은 모사장이 홍보 대사 역할도 톡톡히 해줄 거란 기대도 있었다.
머릿속 구상을 실제로 구현하면 생각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동촌 커피가 딱 그랬다. 자료를 찾고 찾아 이거다 싶어서 박스형 원목 서가를 만들었는데, 해놓고 보니 이게 아니올시다였다.
그 더운 여름날 땀 뻘뻘 흘려가며 세팅 다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초라하고 평범했다. 이게 뭐람. 맥이 빠졌다. 이틀 정도 수정을 고민하다가 아예 새로 만들기로 했다. 버린 카드였던 책 표지 진열 방식으로 바꾸기로 했다. 며칠 동안 공간이 어수선했을 텐데도 동커 사장은 군소리 한 마디 없었다.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내심, 여기부터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했다. 연습 경기를 치른 셈이다.
싹 바꾸고 나니 훨씬 낫다. 사장도 만족하는 눈치고 손님들도 한 번씩 쳐다보며 관심을 가진다.
전부 중고책이다. 오월에 안 보는 책 모은다는 공지를 대책회의에 올렸고 일주일 만에 이백 권 넘게 모였다. 가격표를 붙이면서 회원들이 책을 참 깨끗하게 본다는 데 놀랐다. 물론 너무 험한 책은 안 내놓은 것일 수도 있지만.
만들고 고치고 하느라 시간을 너무 까먹었다. 곧장 2호점 입점을 서둘렀는데, 탈이 나고 만다.
그리고 아주 큰 변화를 고민하게 된다.
역시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 일은 드물다.
* 동촌 커피는 서가를 2층 전체로 확대하기로 했다. 다음 글에 쓰게 될 사건 때문에 지연되고 있지만.
<동촌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