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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같은 '일'

by 수필버거

일어날 법한 일을 설득력 있게 쓴다는 점에서 소설과 사업계획서는 닮았다. 소설 구성의 세 요소는 인물, 사건, 공간이다. 사업계획서도 마찬가지다. 경영자는 인물, 아이템은 사건, 시장은 배경으로 등치 할 수 있다.


소설은 착상(着想), 구상(構想), 초고(草稿), 퇴고(推敲)의 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착상으로부터 소설이라는 유니버스가 탄생하므로, 글감을 잡는 순간은 빅뱅의 순간과도 같다. 사업도 아이디어. 시장조사. 계획서 작성. 실행 및 수정 보완의 단계를 거친다. '이거다' 하는 사업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순간에 이어 무수한 시나리오가 연쇄 폭발하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다.


착상.

사진 한 장, 기사 한 줄, 말 한마디, 스친 생각 하나.

많은 작가들은 일상에 날아든 찰나(刹那)가 소설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거기에, '왜 그랬을까', '무슨 일이 일어날까', 호기심과 상상력을 더하면 '찰나'는 풍성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본 매거진에 쓰고 있는 이야기는 근 10년 전에 읽은 신문 기사 한 개로 시작됐다. LP, CD, 책 대여점으로 시작한 서른 평 짜리 츠타야가 롯폰기 점부터 스타벅스와 결합한 서점 편집샵 형태를 갖추고, 다이칸야마 T-site을 필두로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츠타야 서점의 모습으로 본격 진화한 스토리를 다룬 기사였다. '와, 부럽다' 하고선 잊었다. 아니, 잊은 줄 알았다. 아니었다.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중첩된 우연을 양분 삼아 발아하고 생장하여 누군가의 꿈이 됐다.


구상.

소설가가 장편 한 편을 쓰는 데 몇 년씩 걸린다고 한다. 10년, 20년도 드물지 않다. 소설의 모티프가 생기더라도 조사와 취재로 자료와 에피소드를 모으고 인물 창조도 해야 한다. 그리고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적절하게 시간과 사건을 배치하는 플롯을 짜야한다.

구상 단계가 어려운 건 건축물의 설계도를 그리는 것과 같아서다. 설계가 잘못되면 건물은 무너지고 스토리는 붕괴된다. 구상을 잘해야 소설 첫 줄을 수 있다.


츠타야 서점 같은, 책을 중심에 두고 체류와 체험을 더한 매장을 만들고 싶었다. 꽤나 강렬한 욕망이었다. 그렇다고 당장 거대한 츠타야를 덜컥 차릴 수는 없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한 가지 생각을 오래 하면 온몸이 안테나가 된다. 매일 듣는 라디오 DJ의 멘트 한 마디, 커피숍 옆 테이블에서 흘러드는 대화 한 토막, 드라마 대사 한 줄도 다 내 관심사에 관련된 은유로 들린다. 소설을 읽어도, 철학서를 읽어도, 역사책을 읽어도 내가 끼고 사는 생각에 관한 것들만 핀 조명을 비춘 듯 도드라져 보인다. 자다 깬 어스름 새벽에 문득 떠오른 생각을 행여 놓칠까, 머리맡을 더듬어 찾은 폰에 급한 메모를 한 밤도 부지기수였다.



밀리의 서재의 '수필버거의 서재' 캡처 사진이다. '대책회의 프로젝트' 책장은 서점의 미래, 공간 비즈니스, 로컬 및 커뮤니티 비즈니스, 트렌드 분석 등 직접 관련 는 책을 모았고, '비즈니스 소스'는 성공한 사업가의 경험이 녹아 있는 책과 통찰과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책을 킵한 책장이다. 모든 책을 정독하진 못했지만 발췌독, 속독이라도 했다. 읽다가 팽개친 책도 일부 있긴 하다.


그렇게 구상한 내 꿈의 구성을 정리하면 '커뮤니티 퍼스트, 실물 공간 세컨드'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람부터 모으자는 뜻이다. 아마 십 년 전에 이 일을 구상했더라면 순서가 전도됐을지 모른다. 식당부터 차리고 마케팅으로 고객을 모으는 전형적인 방식을 큰 고민 없이 따랐을 텐데, 코로나라는 역사적 변곡점을 겪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오프라인 매장의 개념이 확 달라졌음을 길마다 나부끼는 임대 현수막을 보면서 체감했고 많은 공간 비즈니스 관련 책을 읽으며 확신했다. 오래된 투자 격언처럼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는 건 위험한 일이다. 더구나 나는 만회할 시간 여유도 없는 오십대다. 사람이 어느 정도 모인 후 시도할 오프 진입도 아주 작은 규모부터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키우는 계획을 세웠다. 다음 글에 쓰겠지만, 내가 그리는 오프 거점의 그림에는 중고책 거래의 재미, 회원 아지트 제공(토론 모임, 독서 및 글쓰기 공간 등), 할인 혜택, 스몰 브랜드 지원 등이 망라돼 있다. 대책회의 단독 아지트가 될 소형 서점형 편집숍 오픈을 향한 중요한 첫 발이다.


초고.

소설가 조정래가 쓴 초고 쓰기에 관한 재미난 글 읽은 적이 있다. 단어와 문장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런 내용이다. 취재와 조사를 바탕으로 만든 소설 공간에 작가가 창조한 인물을 풀어놓으면 캐릭터가 살아 뛰어다닌다고 했다. 그들 사이에 만들어진 사건을 받아 적기만 해도 초고가 완성 된다는 것이 요지였다. 꽉 찬 결말과 마지막 문장까지 정해놓고 첫 문장을 시작하는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플롯과 등장인물이 손에 잡히면 쓰기 시작하는데, 글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작가 자신도 모른다는 경우도 많다. 등장인물의 행동을 따라 쓰기만도 바쁘다는 작가도 있다.


독서 커뮤니티 대책회의는 네이버 밴드에 둥지를 틀었고 조금 더 확장하려는 마음에 동명의 네이버 카페도 만들었다. 현재 약 220명가량의 회원이 있다. 예상보다 1년 정도 늦었지만 오프라인에 조심스레 첫 발을 내딛는다. 소설의 도입부를 지나 전개부로 넘어가는 느낌이다.


츠타야의 큐레이션을 대폭 축소시키면 책, 굿즈, 커피가 남는다. 대책회의 오프 거점은 중고책, 스탠다드 문구, 커피로 시작하기로 하고, 리스크를 조금 줄인 샵인샵 형태로 출발하기로 했다. 타깃 매장은 책과 문구가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은 대형 카페와 대형 문구소매점으로 좁혔다. 중고책을 모아야 했다. 대책회의 회원 대상으로 당근마켓처럼 중고책을 팔 수 있는 장터를 만들겠다는 공지를 올렸다. 보름 만에 220권이 넘는 중고책이 모였다. 문구는 작년부터 준비한 천연 가죽 제품과 무지 노트, 포스트잇(점착메모지), 무지 수첩, 엄선한 고급 필기구 등 읽기와 쓰기에 충실한 상품으로 정했다. 앞으로 숨은 보석 같은 하우스 브랜드 제품을 발굴하여 구색을 늘려갈 생각이다.


지난주에 큰 카페 2층에 책장과 상품을 들였다. 첫 점이다 보니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많이 보였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조금씩 고치고 보완하고 있다. 이번 달에 2호점까지 세팅을 마치려는데, 첫걸음에 지체가 생겨 걱정이 크다. 퇴고를 병행하며 초고를 쓰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다. 캐릭터와 사건을 쫓아가며 받아 쓰고, 글을 수정하는 동시에 다음 문장을 고민하고 있다.


퇴고.

김연수 작가는 퇴고를 토고라고 부른다. 토할 때까지 고치고 고치고 또 고쳐 써서 그렇단다. 정유정 작가는 퇴고를 '갈아엎는다'라고 표현한다. 몇 번을 처음부터 새로 쓰듯 고쳐 쓴단다. 어쩌면 초고와 최종고는 완전히 다른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좋은 소설은 그런 고통을 통해 탄생하나 보다.


온전한 나의 퇴고는 십 년쯤 지난 후에 하게 될 것이다. 원하던 목적지에 이르러도, 하다 하다 포기해도, 퇴고의 시간이 오면 완전히 새로 쓰듯 고쳐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각색된 기억과 윤색된 추억을 편집하여 내 삶의 스토리의 최종고를 쓰게 될 것이다. 받아 든 결과에 따라 장르는 전혀 달라지겠지만.


어떤 결말이 맞더라도 내 글은 남는다. 성공한 해피엔딩의 스토리가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무가치(無價値)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지금, 장르도 정해지지 않은 소설 초고를 미친 듯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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