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봤는데, 오후에 또 보고 싶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꾸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보고 싶으면 봐야지. 다시 가서 보았다.
다음 날 아침 출근길에 편의점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또 생각이 났다. 상동교 다리를 건너고 회사 반대 방향으로 우회전을 했다. 이른 아침 신천대로는 한산하다. 김광석길까지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여름 두 달 동안 점빵을 보러 다녔다. 공장 일 지속 여부를 확실히 결정하지 못한 때였다. 당분간은 회사 일과 책방(겸 어른 문방구)을 병행하고 싶은 바람에 작은 가게 위주로 보았다. 8평, 12평, 16평. 크기를 늘려가며 찾아도 이거다 싶은 곳은 없었다. 엑셀 사러 갔다가 그랜저 몰고 나왔다는 오랜 전 친구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부동산도 그렇다. 임장을 하다 보면 눈높이가 한 계단씩 살살 올라간다. 생각이 어정쩡하니 반드시 찾고야 말겠다는 마음은 작았다. 생각과 마음이 합의를 보지 못한 상태. 되면 좋고 안 돼도 그만이었다. 설렁설렁 보러 다녔다.
정한 마음 없이 무작정 동해 해안도로를 따라 강릉까지 달리는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다. 운전 명상의 효과인지, 고향 같은 바다의 힘인지 모르겠지만, 라디오 잡음처럼 지지직거리던 감정 찌꺼기는 떨쳐냈다. 삼십 년 가까이해 온 업(業)을 정리하는 것도, 낯선 일을 새로 시작하는 것도 감정 개입 없이 차분히 수용하고 추진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심기일전. 목공방 동생과 함께 네이버 부동산을 다시 훑기 시작했다. 한 평이라도 넓은 면적과 한 걸음이라도 더 좋은 입지 가까이 가기 위해 꼭 1층이어야 한다는 욕심도 버렸다. 그럼에도 몇 번이나 더 허탕을 쳐야 했다.
여느 때처럼 공장 뒤뜰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공장을 책방으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떠오르는 대로 장단점을 휴대폰 메모앱에 적었다. 앞산(등산로)과 가깝다. 대중교통편은 좋지 않다. 신천대로와 앞산 순환로가 만나는 접근성은 괜찮다. 주차장이 넓다. 앞산 공영주차장과 도보로 삼 분 거리다. 지금 구하고 있는 임대 매장에 비하면 몇 배나 넓다. 공장 건물답게 층고도 4미터로 높은 편이다. 천장까지 책 표지 노출 방식으로 진열한다면 꽤 특색 있겠다. 외관은 오래된 공장 모습 그대로 두는 게 외려 독특하다.
단, 내 평생의 업(業)은 예상보다 일찍 정리해야 한다.
어느새 9월 마지막 주에 접어들고 있었다.
공장을 책방으로 바꾸겠다는 아이디어는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무산 됐다. 뜻밖에 후련했다. 낙담할 줄 알았는데. 누가 내 고민을 대신 해결해 준 것 같았다. 차라리 잘 됐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던 건, 상황과 형편에 맞추려 남들 눈에는 빤히 보이는 단점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는 방증(傍證)이다.
긴 추석 연휴를 코앞에 둔 어느 아침, 공방 동생이 핫플레이스 대봉동 봉리단길과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중간쯤의 3층 30평 임대매물 링크를 보내왔다. 썩 좋지는 않지만 막 나쁘지도 않다. 곧장 부동산 중개인에게 전화했다. 임장 약속을 하는데 뭐 하실 거냐고 묻는다. 이런 통화에서 자주 받는 의례적인 질문인데, 여태껏 들었던 여타 중개인들의 목소리완 다른, 자기 일에 대한 성심 같은 걸 느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책방의, 북카페의 모습을 상세히 설명했다. 부동산 사무실에 갔을 때 젊은 중개인은 두 건을 더 준비했다고 하더니 큰 화면으로 거리뷰를 보여주며 짧은 브리핑을 했다. 그 일이 무엇이든, 자신의 일에 애정 어린 태도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건 귀하고 반갑다.
요청한 물건은 제일 마지막에 보기로 하고 중개인이 추천하는 방천시장 김광석길 3층부터 갔다. 위치는 베스트. 단점은 엘리베이터 없는 3층이라는 것과 1층을 포기한 대가치곤 작은 20평이라는 것, 그리고 현 임차인이 요구하는 시설비가 예상보다 크다는 점이었다. 추천 물건인 두 번째와 정작 보기로 했던 세 번째 물건은 눈에 차지 않았다. 회사로 돌아왔는데 김광석 길 3층 매장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오후에 공방 동생과 함께 다시 갔다. 옥상까지 꼼꼼히 살폈다.
"형님, 딱인데요."
"그쟈, 위치가 다했다. 건물도 깔끔하고."
중개사에게 시설비 조정을 부탁하고 연휴에 들어갔다. 쉬는 열흘 동안 열 번도 더 갔다. 아침에, 점심에, 저녁에, 김광석길에 약속 있는 김에, 가고 또 가고 보고 또 봤다. 유동인구 조사 같은 목적은 핑계였다. 그냥 자꾸 가고 싶었고 자꾸 보고 싶었다.
그 건물 앞에 서 있으면, 머릿속에 그림이 마구 떠오른다. 밝은 원목으로 서가를 완성한 모습, 노랑 조명이 은은한 실내 모습, 책이 진열된 모습, 내가 환하게 웃으며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대책회의 독서 모임을 여는 모습, 작은 공연을 하는 모습, 북토크를 진행하는 내 모습이 영화 예고편 클립 영상처럼 눈앞을 스쳐간다.
이건, 인연이다.
명절 후 가계약을 하고 약정 금액을 송금했다.
임대인이 해외여행을 길게 갔대서, 본 계약은 11월에 하기로 했다.
부동산은 인연이다.
경험으로 안다.
연인을 만나는 것과 같다.
결혼으로 이어질지, 파투(破鬪)가 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나, 보고 또 보고 싶은 이 마음이 참 희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