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가 어떨지 확실치 않으면 불안하다. 불안은 몸도 불편하게 만든다. 조금이라도 불안을 덜어 보려고 다리를 달달 떨고 손톱을 물어뜯는다.
우리가 살면서 결과가 확실한 경우가 몇 번이나 될까. 목표 달성이 확실시되고 유력시까지 돼도 우리는 불안하고 또 불안하다.
결과를 확신하게 만드는 확실한 방법이 있을까?
세밀한 계획과 차분한 실행이 불안을 줄여주는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
과연 계획이 충실하면 불안이 없어질까?
도대체 어떤 계획을 어떻게 세워야 할까?
읽지 않을 책을 샀다. 정독하지 않을 작정이어서 구매 결심까지 걸린 시간이 길었다.
영화 기생충의 수상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면서, 살까 말까 망설이던 책을 마침내 샀다.
읽지는 않겠다는 확실한 계획을 세우고서.
영화 기생충의 각본집과 스토리 보드북.
봉준호의 계획이 궁금했다. 도대체 얼마만큼 확실한 계획을 세우고 영화를 만드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내가 영화 관계자가 아니니 각본집을 정독할 이유는 없다.
그래도 영화 한 편을 몇 년 동안 계획하는 그의 작업 방식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어느 정도의 치밀하고 디테일한 계획을 세우면 이런 확실한 결과물이 나올까?
다른 분야에 속해있는 사람에게도 좋은 참고서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읽지 않을 계획이지만 책은 샀다.
영화 기생충에는 두 가지 계획이 나온다.
살면서 날 수 있는 모든 탈이 나버려서 이제는 새털 무게만큼의 탈만 더해져도 바사삭 부서질 지경인 기택(송강호 분)은 무계획이 상책이라고 믿는다.
계획은 원하는 결과에 대한 기대를 전제로 만들어질 텐데, 기대가 생기면 부록처럼 불안도 생긴다.
그 불안은 견딜 수 있는 체력과 기력을 요구한다.
게다가 계획의 결과가 예상 밖이라면 심신은 좌절의 충격을 또 견뎌야 한다.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기택은 또 무너지고, 견딜 자신이 없다.
그래서 절대 실망하지 않는 방법을 갖고 산다. 계획을 아예 세우지 않는 무계획이라는 방법을.
무계획에 기대어 사는 기택의 대척점에 아들 기우(최우식 분)와 딸 기정(박소담 분)이 있다.
"역시 넌 계획이 다 있구나!"
부자인 동익(이선균 분)과 연교(조여정 분)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려고 재학증명서를 위조하는 기우와 기정의 짓거리에 기택이 하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기우와 기정의 행동도 계획이라 보기는 어렵다.
처음의 시도는 우연히 받게 된 병아리 똥 같은 작디작은 기회의 씨앗을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임시변통에 가깝다.
물론 그 후에 동생 기정을 동익의 집으로 끌어들이고, 기택과 충숙(장혜진 분)까지 끌어들이는 과정은 계획일 수 있겠다.
기우의 첫 계획과 이후의 기정과 기택의 계획은 온 가족이 부잣집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서 편하게 사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꾸역꾸역 쌓여간다.
그 모든 계획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비극으로 끝이 나고, 기택은 감옥 같은 저택의 더 깊은 지하감옥에 빠져나올 기약도 없이 갇힌다.
원래의 반지하보다 더 낮은, 이제 타인의 발을 훑고 들어오던 어스름한 햇빛조차 기대할 수 없는 완벽한 지하에서 겨우 숨만 쉬며 산다.
모스 부호로 아버지 기택의 상황을 알게 된 기우는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돈을 많이 벌어서 그 저택을 사겠다는. 그래서 아버지를 구하겠다는.
"목표만 있고 방법이 없는 기우의 그 계획은, 계급제의 공고한 시스템 속에서 근본적인 계획은, 결국 무계획이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중에서 / 이동진 저)
그렇게 기우의 계획은 무계획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결국 기택의 무계획과 기우의 임기응변적 계획은 같은 것이었다.
책을 받자마자 각본집은 제쳐두고 스토리 보드북부터 펼쳤다.
가장 궁금했던 기택 가족이 동익의 저택에서 빠져나와서 반지하 집으로 가는,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여정 부분을 살폈다.
이게 뭐지?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하강을 거듭하며 그들의 반지하집으로 처연하게 돌아가는 경로가 아주 자세하게 그림으로 나와있다.
다른 부분들도 봤다. 투박한 그림이지만 영화 한 편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영화의 장면과 똑같다. 난생처음 보는 스토리 보드북이라서 다른 감독들도 이렇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영화 한 편이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봉 감독의 머릿속에 완벽하게 그려져 있었구나.
이 정도면 수많은 스텝들과 소통에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고, 메시지를 더 잘 드러내는 디테일에만 신경 쓰면 되겠다.
배우들도 완벽한 그림을 가지고 연기를 시작하기에 역할 분석에 집중할 수 있었겠다.
봉 감독이 황금종려상과 오스카상 수상까지도 계획을 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완성도의 설계라면 계획을 세움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불안은 최소화할 수 있었겠다.
여타 참여자들, 투자자부터 스텝과 배우들까지 확실한 그림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 게다.
어쩌면 나는 계획을 잘못 해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꿈을 작게 나누고 단계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스몰 액션을 그리는 설계도가 계획일 텐데, 나는 나중에 나올 결과에 대한 기대에만 집착하지 않았을까?
모든 계획은 불안을 낳는다고 오해한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계급사회의 아래에 위치한 사람들은 당장의 결과가 중요하다.
밥과 돈으로 상징되는 최소한의 안전이 시급하다. 그래서 그들의 '계획'은 '내몰림'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들은 계획이라고 믿지만 사실은 무계획인 것과 마찬가지지 않을까?
봉준호는 자신의 꿈에서 계획을 뽑아냈다. 영화라는 결과물로 돌진하는 계획서(스토리보드와 각본)로 투자와 동참을 얻었다.
황금종려상이나 오스카상을 목표로 여기고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지는 않았을게다.
그의 계획은 자신이 세상에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라는 틀 안에 넣는 것까지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메시지를 어떤 영화로 만들겠다는 명확한 설계도(각본과 스트리 보드)를 외로이 만들면서 이미 불안은 모두 소화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다음은 뚜벅뚜벅, 성큼성큼 나아가는 일만 남았으리라.
이런 것이 계획이구나. 자신의 불안까지 녹여 넣고 동료들의 흔쾌한 헌신을 이끌어내는 선명한 설계도와 실행력.
우리는 이런 것을 준비라고 부른다.
봉준호의 계획은 치밀한 준비였다. 기회를 낚아챌 완벽에 근접한 준비.
자연히 불안은 최소화된다.
휴지통(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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