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게 편지를 쓴다. 낯설다. 술잔이 앞에 없어서 어색하구먼. 하하.
그래도 말보다는 글이 휘발성이 덜하겠지 싶어서, 흘려듣지 말라고 굳이 쓴다.
작년부터였던 것 같다. 30여 년 봐왔던, 그것도 드문드문이 아니라 자주 봐왔던 내 친구의 모습이 아니구나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게.
며칠 전 네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걸 축하한다고 핑계 김에 또 술자리를 만들었지.
축하는 하지만 기쁨과 성취감은 짧고 허전함이 클 거라고 내가 말했고. 이제 뭔 낙으로 사냐고 네가 답했다.
그럴 거다. 중년을 넘어 장년으로 치닫는 나이에 삶의 즐거움을 찾기란 쉽지 않다. 너도 그렇고 나도 마찬가지다.
매일의 낙이 사라진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네가 의욕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매사 심드렁하고 강퍅해진 모습도 보기에 안타깝더라.
건강도 나빠진듯하고. 몸이 약해지니 마음도 약해지는 악순환의 루프 빠진 듯 느껴지더구나.
네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내 얘기를 하나 하려 한다.
너도 기억하겠지만 내가 사업실패를 하고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그래도 술 한잔 하자고 연락을 준 이는 너 하나뿐이었다.
그때 내 모습을 생각해봐라.
시커먼 낯빛으로 이렇게 다시 성공을 할 거라는 둥, 저렇게 단숨에 잃은 것들을 복구를 할 거라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나 지껄이던 내 모습을.
실은 그 당시 한 일이 년 동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피폐했고 견디기 힘든 상황을 빨리 탈출하고 싶은 욕망,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었다. 내가 뭐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은 채.
그런 절박하기만 한 탈출 욕망을 의욕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어쨌거나 막막한 상황에서는 벗어났다.
어떻게 빠져나왔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중에서 내가 생각하는 핵심적인 이유 한 가지를 얘기하려 한다.
후회와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잃은 건 '돈'과 '사람' 그리고 '시간'이구나.
하나하나 따져봤다.
돈.
꽤 오래 걸리겠지만 다시 벌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
잃은 사람, 떠난 사람 중 그래도 몇몇은 다시 보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인연도 생기지 않을까?
돈과 사람. 두 가지 모두 쉽지는 않겠지만, 복구가 완전히 불가능해 보이진 않더군.
문제는 시간이라는 놈이더라고.
망하느라, 다시 일어서느라 날려버린 그 시간들은 어쩌나. 그 길고도 아까운 내 시간은 어쩌나.
시간은, 세월은, 되찾을 방법이 없더라.
차선책으로 천천히 늙어가자고 결심을 했다. 그리고 다시 어떤 기회가 왔을 때 힘껏 마중할 체력을 길러놓자고 결심했다.
그래! 운동이 답이다!
운동을 시작했다. 거창하지 않았다. 운동을 하자고 결심을 했고, 바로 운동화를 신고 문을 나섰다.
그리고 걸었다.
방향도 없고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첫날은 한 시간 걷고 뻗었다. 오랜 시간 술로, 후회로, 과로로 찌든 몸은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더라.
아침에 눈을 뜨면 걸었고, 밥을 먹고 걸었고, 걸어서 퇴근을 했다.
반년을 그렇게 걸었다. 이제 두세 시간 걷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더구먼.
하루 종일 걷기만 할 수는 없는데. 일도 해야 하는데.
아내에게 부탁을 했다. 자전거를 한 대 사달라고.
째려보지. 당연히. 생활비, 아이들 학원비도 부족한데.
그래도 사주더라. 엄청나게 고마웠지.
걷기 시작했을 때처럼 또 무작정 탔다. 동서남북으로 타고 돌아다녔다.
한 일 년 탔더니 주말엔 시 경계도 막 넘고, 국도를 타고 고개를 막 넘고 그러고 있더라.
자전거도 성에 차지 않을 때쯤부터는 헬스클럽도 다니고 그랬다.
애들이 아빠 몸처럼 되려면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지경까지 되더라고.
내 얘기가 길었네. 나이가 드니까 말을 멈출 지점을 자꾸 지나친다. 흠... 쯧쯧.
윤태호 작가의 '미생'에 나오는 대사다.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거든 체력을 먼저 길러라.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거든 체력을 먼저 길러라.
게으름, 나태, 권태, 짜증, 우울, 분노.
모두 체력이 버티지 못해 정신이 몸의 지배를 받아 나타나는 증상이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승부 따윈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충분한 고민을 버텨줄 몸을 먼저 만들어.
'정신력'은 '체력'이란 외피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 돼."
격하게 공감했다. 내 생각이 맞았구나. 운동을 시작하길 잘했구나.
뇌도 몸이다. 허벅지가 굵어지고 배가 들어가면서 생각과 마음도 단단해지더라고.
생각은 뇌에서 이뤄지고 육체는 그 생각을 실행한다.
내가 운동을 시작하고서 느낀 가장 큰 변화는 의욕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몸이 튼튼해지기 시작했고,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하더라고. 매일을 지탱해주는 육체는 덤이고.
친구야. 이 글을 읽으면 바로 운동화를 신고 문을 나서라.
걸어라. 10분도 좋다. 목표도 목적도 생각하지 말고 발걸음 가는 대로 나풀나풀 걸어라.
한 달 후에 너의 느낌을 얘기해다오.
이것도 저것도 해보고 싶어 졌다고 얘기해다오.
무엇과 무엇을 이루고 싶어서 이것과 저것을 당장 시작할 거라고 말해다오.
늘 그래 왔듯이 또 파안대소를 하며 소주 한잔하자.
내가 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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