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냄새

작은소설 005

by 숲풀 supul


여름은 늘 뜨겁고 습하고 답답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을 송두리째 뽑아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날은 역시나 여름의 한가운데에 있었고, 공기는 축축해서 무거웠으며, 나를 익히는 열기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인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런 평범하다면 평범한, 온 세상이 열기에 이글거리는 여름날이었다.


에어컨은 이 시대를 바꾼 발명품이다. 만약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여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분명할 것이다. 이 지구상의 수백만 명 정도는 에어컨 덕분에 살아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할 만큼 바깥의 여름은 살인적이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도, 땅에서 일어나는 지열도, 온 세상을 뒤덮은 공기마저도. 이 세계를 거대한 오븐에 넣어두고 햇빛과 수증기로 지글지글 구워내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이것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신이든 무엇이든 이 계절의 조정에 실패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쓸 데는 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 재생하며 이 계절을 저주했다. 아마 앞뒤로 노릇하게 구워지는 동안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비생산적인 생각을 끝도 없이 진지하게 반복할 리가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은 생각만 하면서, 에어컨을 추울 정도로 시리게 온도를 설정해 두고 차가워진 바닥에 드러누웠다. 벽 한 쪽을 전부 차지하는 커다란 베란다 창문 너머로, 거꾸로 보이는 하늘을 흘겨보듯이 눈을 치켜떠 쳐다보았다. 선명한 푸른 빛의 하늘, 그 위에 붓으로 그린 것처럼 선명한 하얀 구름.


나는 그것들이 느리게 흘러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깨끗한 흰 천이 가로막기 전까지는. 아니, 천이 아니라 옷자락이었다. 옷도 천이니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건 단순한 천 조각이 아니라 누군가의 옷자락이었다. 하얀 구름처럼 똑같이 느리게,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누군가의 하얀 옷자락. 그것을 본 나의 모습은, 아마 눈이 튀어나올 듯이 놀란 표정으로 당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눈이 마주친 그 사람이 웃으며 손을 흔들다가, 그대로 그냥 둥둥 떠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멈춰 선 것일 터였다. 바로 우리 집 베란다에.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집 베란다 바깥의 난간에. 작열하는 태양열에 몇 날 며칠이고 노릇노릇 익었을 철제 난간에. 뜨겁다 못해 날달걀이라도 갖다 대면 치이익 소리를 내며 달걀튀김이 될 정도일 텐데, 그런 티도 안 내면서.


그 사람이 내려선 베란다로 통하는, 커다랗고 뻑뻑한 유리문을 밀어 열었다. 더운 여름날의 공기가 거대한 파도처럼 훅 집 안으로 불어닥쳤다. 한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내 숨막힌다는 표정 때문인지, 그 사람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괜찮냐 물어왔다. 코로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까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느낌에, 미간을 찡그리며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사람의 표정이 조금 풀리는 것이 보였다. 티가 날 듯 말 듯 슬그머니 아래로 쳐졌던 그 사람의 눈썹이 완벽하게 제자리를 찾은 채였다.


“그런데 왜 그렇게 찡그리고 있어?”


“공기가 답답해서요.”


“공기가 답답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공기가 어떻게 답답할 수 있는데?”


“덥잖아요. 온도가 높고. 습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표현이네.”


“당연하죠. 좋아하지 않는다기보다 오히려 싫어하는데요.”


“여름이 싫다는 거야? 여름 공기가 싫다는 거야? 아니, 어느 쪽이든 내가 들은 중 가장 충격적인 발언이긴 하다.”


그 사람의 주변에는 평범한 사람이 별로 없는 게 분명했다. 그보다 왜 반말이지. 나는 왜 존댓말을 하고 있고? 딱히 중요한 부분은 아니니 넘어가자. 애초에 하늘을 떠다니는 부분에서 사람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으니까.


“제 주변 사람들은 다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에요.”


“그것도 그 다음으로 충격적인 발언이야.”


“왜 좋아해야 하는데요?”


“그야, 여름에는 바람을 타고 떠다닐 수 있잖아. 겨울 공기는 너무 바싹 말라 있는 데다가 가벼워서 내가 가라앉아 버리는걸.”


“제 알 바는 아니네요. 저는 여름이든 겨울이든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하거든요.”


“오, 그렇지.”


그 사람은 설득된 것처럼 잠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 허술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럼, 잠시 이리로 와 봐.”


미심쩍어하는 표정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났을 것 같았다. 드러나고 말고,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으니 마음껏 미심쩍어하는 티를 내며 다가갔다. 그 사람이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허술한 방충망을 열고 들어오면서, 이제 내 앞에는 밖과 안을 구분지을 수 있는 거라고는 무엇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에어컨이 틀어진 시원한 방 안의 중심부에서 한 걸음씩 멀어질 때마다 짙어지는 여름 공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숨을 깊게 들이마셔 봐. 여름은, 대지에 두 발을 딛은 채로 닿을 수 있는, 물속의 세계에 가장 가까운 계절이니까. 공기가 머금고 있는 물을 들이켤 때마다, 바닷속의 맑은 기포를 들이마시는 것 같지. 여름의 태양에 미지근해진 바다 말이야. 땅에서 물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는 쉽지 않아. 그게 여름의 매력이지.”


그 사람의 말을 따라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지만, 더운 건 매한가지였다. 덥다 못해 햇볕이 뜨거웠다. 공기는 습했다. 그 사람이 하던 말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웃을 때마다 흔들리는 흰 옷자락에서 깨끗한 물의 냄새가 났다. 여름의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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