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소설 008
가볍게 짐을 챙겨 들고 나섰다. 그리 멀리 나설 계획은 아니었다. 바로 근처의 카페가 오늘의 유일한 목적지였고, 그곳에서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며 책이나 좀 읽다 나올 생각이었다.
엊그제, 아무 생각 없이 지나는 길에 눈에 들어온 카페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투박한 입간판만이 그곳의 유일한 표식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반듯한 사각형의 창문도 보였다. 하늘하늘한 천이 불특정 다수의 눈길이 그 공간 안으로 침범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길에 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조그마한 간판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색감의 나무 문. 구리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듯한 손잡이는 여러 사람의 손길을 받아온 티를 내는 것처럼 반질거리며 햇빛을 희미하게 반사시켰다.
구리 손잡이를 밀지 잡아당길지 잠깐 고민한 후에 잡아당겼다. 당기는 게 맞았나 보다. 문은 부드럽게 열렸지만, 나무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생각보다 무거웠다. 경첩에서는 끼익, 하는 소리도 났다. 힘을 조금 더 주어 열고 들어가자 편안한 갈색이 가득 들어찼다. 시야를 가득 채운 짙은 빛깔의 나무들. 심지어 바닥도 나무로 되어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들이 다 제각기 자기 멋대로인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비슷비슷한 나무의 색감 덕분인지 통일성이 느껴졌다. 그 장면에 압도당한 것인지는 몰라도, 나무 특유의 부드러운 향이 코끝에 닿았다. 그 감각이 싫지 않아 숨을 조금 더 깊게 들이마시자, 그 묵직한 향내에 섞여, 고소한 냄새가 났다. 밀가루 덩어리가 구워지는 냄새였다. 얇고 반투명한 천으로 만들어진 커튼을 비집고 들어오는 하얀 햇빛과 이 공간의 냄새가 만나자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정하고 포근한 감정을 자아냈다. 처음 발을 디딘 공간이 이 정도로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포근한 안개, 덩어리진 햇빛, 뭉글거리는 온기, 혹은 묵직한 바닐라 향기에 둘러싸인 느낌이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카페 안에는 남녀 한 쌍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테이블 하나를 제외하고는 방문객이 없었다. 인상 좋은 카페 주인, 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카페 안쪽에 위치한 카운터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의 시선에 인심 좋은 미소가 돌아왔다. 곧바로 주문을 했다. 바닐라 라떼로. 이상했다. 나는 늘 아메리카노나 드립커피를 선호하는 사람이었는데, 오늘 이 공간은 왜인지 바닐라 라떼 같은 기분이었다. 이상했지만 여전히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고민 없이 창가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책을 읽을 때는 보통 직접 내리꽂히는 햇빛을 피하는 편이지만, 얇은 커튼 덕분인지 창가 자리가 썩 괜찮아 보였다. 저번에 시간이 났을 때 반쯤 읽고 그대로 두었던 책을 꺼내, 멈추어있던 부분부터 다시 시작했다.
몇 장을 넘겼을까,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책에 박혀 있던 시선을 들었다. 아까와 같은 사람 좋은 미소가 눈앞에서 번졌다. 맛있게 드세요,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소근거리는 말을 남기고 다시 카운터로 향하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나무 테이블 위의 커피로 눈을 돌렸다.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하얀 안개에 햇빛이 비쳐 들어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 일렁임 너머로 보이는, 옅은 상앗빛을 띤 두꺼운 도자기 머그잔의 둥글둥글한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다. 살쪄서 뚱뚱한, 둥글둥글해진, 그만큼 여유로운 고양이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바닐라 라떼가 담긴 머그잔을 보면서 고양이 같다고 생각하는 나도 좀 이상한가, 하는 생각이 연달아 들었지만 누가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머그잔의 경계선 너머까지 봉긋하게 올라온 하얀 우유 거품이 탐스러웠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컵을 들었다. 생각보다 묵직했다. 이 카페를 들어올 때 밀었던 나무 문처럼. 그러고 보니 이 나무 의자도 생각보다 무거웠다. 이 카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게 잔잔하고 진중해서, 문도, 의자도, 하다못해 커피까지, 자신의 무게를 확실하게 주장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양새였다.
우유 거품은 입에 닿자마자 달짝지근한 고소함을 남기며 사라지고, 커피의 씁쓸한 끈적거림이 미각을 덮쳤다. 창가 자리에서 책을 읽는 시간에 잘 어울렸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장면하나
#2000자
#짧은글
#작은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