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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R Dec 06. 2020

설거지가 세상에서 제일 싫은 이유

그것은 설거지가 사회의 통념을 주입하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설거지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했다.

물론 설거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마는, 나는 정말 설거지가 너무너무 싫었다.


사실 고리짝 초등학교 저학년쯤까지 설거지는 내가 재밌는 물장난 정도의 일이었다. 비눗방울을 만들 때 쓰던 퐁퐁, 예쁜 그릇들, 콸콸 쏟아지는 물까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집약체였으니까. 그러니까 그때까지 설거지는 못하게 해도 한 번쯤 시도하고 싶은 어른들의 물놀이 었고, 설거지를 싫어하기 시작한 건 아마 20년 전쯤 시작된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설거지를 하도록 강요받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도 싱크대에 쌓여있는 그릇들을 바라볼 때면 주말 저녁에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를 내게 하라고 하던 어른들의 모습이라든지, 퇴근 후 어김없이 나에게만 설거지도 하지 않았냐며 혼을 내던 엄마의 모습이 겹쳐온다. 설거지를 하지 않겠다 했더니 나더러 '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애'라던 소리도 덤으로 들리는 것 같다. 이제 나는 고작 초등학교 중학년이었는데 말이다. 그때 상처를 크게 받았던 건지, 내가 뒤끝이 긴 사람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꼭 그런 모습은 생생히 머리에 박혀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난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고 그때 당시 내가 설거지를 '혐오'수준으로 싫어했던 건 아니다. 그냥 티브이를 보고 딴짓을 하며 놀고 싶은데 어른들에 의해서 강제로 해야 하는 귀찮은 일 정도였다. 식사를 준비해준 엄마의 노고라든지(물론 식사 준비를 돕는 건 나와 여동생이었다.), 퇴근 후 피곤한 엄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기에 싫지만 해야 하는 그런 일이었다.


이 '싫어하는 설거지'가 '혐오하는 설거지'가 되기 시작한 건 중학생쯤 되어서였던 것 같다. 설거지를 하도록 강요받는 게 나와 여동생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러니까 남동생은 쏙 빼고 우리에게만 집안일을 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어린 마음에도 분명 저 나이 때 나는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나쁜 애, 이기적인 애, 지밖에 모르는 애가 됐는데 남동생에게는 아직도 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는 게 논리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우리 부모님은 우리 삼 남매를 거의 공평히 키우셨다. 가사노동에 대한 차별 부분을 제외한다면.


이제 와서 곰곰이 설거지에 대한 내 혐오감을 되짚어보면, 가사노동으로서의 설거지가 아니라 사회의 통념에 굴복시키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설거지가 싫었던 것 같다. 당연히 딸들은 집안일을 도와야 하고 아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집안일은 여자의 일이고 남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적 통념을 내게 주입시키려는 수단. 그리고 거기에 항의하면 '그냥 잔말 말고 해'하고 체제에 순응하지 않은 데 대해 혼이 나야 하는.


설거지로 인해서 많은 시간 동안 부모님과 끊임없는 마찰이 있었고, 혼이 났고,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다. 뭐가 그렇게 속상했냐고 묻는다면, 부모님을 우리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 믿음에 금이 가는 고통 때문이었다고 대답할 것 같다. '딸'과 '아들'을 다 사랑하실지는 모르지만 분명 다르게 생각하시구나, 라는 걸 인지하게 되는 고통. 


칠팔 년 전쯤부터 주말 저녁 여러 사람이 함께한 주말 저녁 설거지 담당은 아빠가 되었다. 주말에 특히 바쁜 엄마의 상황과 왜 딸들이 '설거지'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가 커진 후에 다른 집안일은 해도 설거지는 죽어도 안 하겠다고 버티던 나는 그래도 착한 딸은 하고 싶어서 찜찜하고 미안한 마음에 작년 어버이날 선물로 식기세척기를 사드렸다.




성인이 되고 자취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한동안은 설거지가 싫어 집에서는 밥을 챙겨 먹지 않았다. 아침은 당연히 건너뛰고, 점심은 급식을 먹고, 저녁이 되면 그냥 김밥 한 줄 사다가 간단히 먹고 말거나 카페에 가서 샌드위치를 하나 사다가 입에 물었다. 라트비아에서도 설거지가 싫어 한동안은 베이글이라든지 음식을 테이크 아웃해서 많이 먹었으니까, 나의 설거지 혐오가 나은 것은 정말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이제 나는 이곳에서 매일 설거지를 한다.

하루에 많으면 두 번, 보통은 한 번. 괜히 깔끔을 떨고 싶은 날에는 매 순간순간.


이제 더 이상 기분이 나쁘지도, 극도로 거부감이 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가끔은 씻겨져 나가는 거품과 깨끗해진 그릇을 보며 내 마음도 씻겨 나가는 듯 후련하기도 하다. 아마 이젠 아무도 내게 설거지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며, 내 공간 속 설거지는 모두가 해야 하는 공평한 일상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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