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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R Dec 03. 2020

클라겐푸르트에 첫 눈이 왔다구요.

그리고 나는 강아지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한동안 서리가 내리고 나뭇가지마다 얼음이 얼기를 며칠 반복하더니, 드디어 클라겐푸르트에 첫눈이 내렸다.

하루 일과 중의 하나인 산책을 나서서 나는 길에서 발견한 강아지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강아지가 어찌나 신이 났던 건지 강아지 발자국이 주인 발자국보다 더 깊게 파였다.


보통 첫눈은 오는 둥 마는 둥 좀 내리고 말던데, 오늘 내린 첫눈은 소복이 쌓이고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나이를 제법 먹었지만 아직도 눈이 오는 날이면 기분이 좋고 들떠서 일단 밖으로 나가고 본다. 그리고는 시야를 가리고 눈코입 주변으로 쏟아지는 눈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어찌어찌 걸어가는 것이다.


쏟아지는 눈 때문인지 내가 좋아하는 강변의 벤치에는 사람 대신 눈만 소복이 쌓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산책을 나온 한 가족을 만났다. 유모차를 끄는 부부와 걸어 다니는 꼬마 아이, 그리고 지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작은 강아지 한 마리. 꼬마 아이는 신이 나서 눈을 뚫고 걷고, 부부는 눈에 박힌 유모차를 끌기 위해 서로 반대쪽의 귀퉁이를 잡고 끌었다. 삶을 함께 헤쳐나가듯 부부는 눈을 헤치고 함께 걸었고, 몸이 가벼운 꼬마는 눈앞의 눈을 쫓아 통통 뛰며 제 갈길을 갔다. 강아지와 함께인 지인은 이따금씩 아이와 부부를 번갈아보며 모두 함께 잘 가고 있는지 살뜰히 살폈다.




눈을 뜨니 어제 내린 눈이 쌓여 온 세상이 하얬다. 나는 창문을 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눈에서는 좋은 냄새가 난다. 가을의 공기에서는 차가운 냄새가 나고, 겨울의 공기는 냄새를 가졌다기보다는 그냥 피부를 파고드는 추위로 존재를 느낄 수 있다면, 눈은 머릿속까지 시원하게 해 주는 냄새가 난다. 건물 밖으로 나와 마스크를 벗고 숨을 들이쉬면 얼굴에 닿는 차가운 공기와 내 안으로 흘러드는 눈 냄새가 나를 다시 한번 깨워주는 것이다.


아직 따뜻한 방 안과, 막 내 얼굴에 닿은 차가운 바깥공기와,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 나는 눈을 처음 보는 사람 마냥 그냥 가만히 한참을 바깥을 바라봤다. 그리고 커피 한 모금. 행복하다. 고작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고, 커피를 한 모금했을 뿐인데, 행복했다.


내가 살고 싶은 내 인생은 이런 거였다. 나만의 공간, 커피 한잔과 밖을 볼 수 있는 넓은 창문, 내 안으로 밀려드는 바깥 내음.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내게 주어진 일들을 느리지만 한걸음 한걸음 해 나가고, 당장 내 옆에 있어주지 못하더라도 어딘가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그런데 또 어제 마주쳤던 가족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눈길을 유모차를 끌며 함께 헤쳐 나가던 부부도, 혼자 쭉쭉 나아가던 꼬마도, 그리고 이들을 살피며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걷던 지인까지. 그 꼬마가 참 나 같았다. 큰 일을 다 짊어져주던 부모님 덕에 30년을 걱정 없이 통통 뛰며 여기까지 온.


추운 날씨에 꼬마보다 좀 작은 아이 하나가 탄 무거운 유모차, 끝없이 유모차 바퀴를 물고 늘어지는 제법 쌓인 눈까지, 거친 길을 걷고 있었지만 부부는 행복해 보였다. 지인은 평화로웠고 주인과 함께 나온 강아지의 쫄랑쫄랑 걷는 그 걸음걸이에 들뜸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나에게도 저 부부든 강아지와 함께 걷는 지인이든 둘 중 하나의 역할에 직면할 날이 오지 않을까.


그날이 오면 나는, 또 겸허히 내 역할을 받아들이고 눈길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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