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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R Dec 16. 2020

찌개를 망쳤는데 눈물이 났다.

해외에서 자취하는 유학생의 서러움이란 이런 것일까?

시험 기간이라 매일 할 일이 많은 시기의 어느 수업이 많은 날이었다. 점심을 준비해서 만들어 먹기에 점심시간이 조금 짧길래 틈틈이 쉬는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쌀을 씻고 양파와 마늘을 까며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 밥솥에 밥을 하고, 완성된 찌개를 맛보는 순간 맛이 이상했다. 설마 싶어 찌개에 들어간 돼지고기를 입에 넣어 한 입 물자 마자 내 몸은 자동적으로 고기를 뱉어냈다. 분명 돼지고기 맛인데 역한 게, 고기가 상한 게 분명했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고 바쁘게 움직이던 몸이 멈췄다. 


별 것도 아닌데 왈칵, 눈물이 났다. 서러웠다. 이 날따라 '밥 잘 챙겨 먹어'라는 엄마 말이 생각나서 힘내 보겠다고 고추장이며 각종 야채를 더 듬뿍 넣어 끓였던 찌개였기 때문에 더 서러웠다. 코로나 때문에 못 갔던 한국이 가고 싶고, 엄마가 보고 싶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엄마가 해준 밥이 그립고, 날마다 식사 준비와 공부를 반복하는 하루가 너무 지겹고 지쳐서, 그래서 가만히 서서 눈물을 퐁퐁 쏟았다.


그러고 1분 정도 지났을까, 지극히 현실주의자인 나는 급히 현실로 돌아와 눈물을 닦고 공들였던 찌개를 버리고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휘뚜루마뚜루 간장계란밥에 급한 점심을 해치웠다. 나의 마음은 저 깊은 우울 속으로 떨어졌지만, 나의 현실은 여전히 수업과 시험 일정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언제까지 그렇게 슬퍼하고 있을 수 없었다.


우습게도 간장계란밥을 한 입 넣는데 익숙한 짭조름함과 고소함에 우울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는 금세 지상으로 올라선다. 내 망쳐버린 찌개에 대한 충분한 애도 시간도 주질 않는 가혹한 현실이라니. 아무 일 없다는 듯 또 야금야금 밥을 먹어치우고 후다닥 양치를 하고 다시 수업을 듣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았다.




엄마가 해준 밥이 그립다. 이 말은 나의 모든 그리움을 대표한다. 엄마가 밥해주는 사람이라거나 그저 맛있는 게 먹고 싶다는 철없는 소리가 아니라, 가족의 품이 그립고 한국에 두고 온 사람들이 보고 싶고 익숙한 냄새 익숙한 맛의 음식을 먹고 싶다는 뜻이다. 이 그리움은 비단 해외 생활을 하는 나뿐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자취생들이 느끼는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엄마는 새로운 길에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내가 자랑스럽다고 했지만, 언제나 엄마의 자랑으로만 살고 싶었기 때문에 털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마 많은 자식들이 그렇게 혼자 끙끙 앓아가며 살아가지 않을까.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고, 이제 그냥 집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함께 지내고 싶다고 말하고 싶은데 나는 자랑스러운 자식이라 차마 아무 말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버티는. 그러다 가끔 어느 날 지칠 때면 지금 가는 길이 너무 힘겨워서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을 때가 있어지는 거다. 근래의 나는 이유 없이 눈물을 짜기엔 민망스러워 울만한 핑계를 기다렸다. 망쳐버린 찌개는 내게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주었다. 울 핑계.


찌개를 버리고 나니 내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졌던 것은, 망쳐버린 찌개와 함께 내 마음에 차 올라있던 설움을 흘려보내서였을 것이다. 내 그리움은 아직 움푹 파여있지만은 울 핑계가 없어지니 또 그냥 일상에 한 번쯤 있을만한 해프닝이었나 싶어 진다. 눈물을 터트리고 나니 내 마음속에도 눈물 빈자리만큼 다시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그렇듯 다시 그리움을 힘껏 폴짝 뛰어넘고, 다시 내가 할 일을 해 나가는 것다. 그러다 시간이 좀 나면, 내 그리움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움이 쌓여있다'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그리움은 '파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 깊이 파이고 파이고 또 파여서, 어느 날 걸음을 떼어보려고 하면 하염없이 걸려 넘어지는 마음에 움푹 파인 자국이 그리움이라고. 혹시나 너무 깊은 그리움을 만나면 그 안에 빠져서 웅크리고 하염없이 작아지게 되는. 그러다 그리운 이를 다시 만나면 나는 다른 편평한 곳에서 마음을 파다가 메꾸는 것이다. 그러면 이미 파인 그리움은 편평해지고, 편평했던 자리에는 다시 새 파임이, 새 그리움이 생긴다. 그러면 나는 또 새로 생긴 그리움이 마음에 걸려 파임의 깊이를 적당히 얕게 유지해보려고 왔다 갔다 하며 팠다가 덮었다를 반복할 것이다. 


그러다 나이가 더 들어서 내 마음을 돌아봤을 때, 이곳저곳 움푹움푹 파인 곳들을 보며 마음 저려할 것이다. 여기저기 파인 그리움을 보면 밀려드는 그날의 기억이 속에서, 그때 참 좋았는데, 하면서. 그러나 나는 또 돌아서서 계속 걸어갈 것이다. 그리움은 과거에 대한 미련이라 내 마음을 저리게 하는 것 외에는 힘이 없지만, 내게는 앞으로 살아내야 할, 책임져야 할 것들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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