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을 분출할 누군가를 찾는 당신에게
"ㅇㅇ쌤은 정말 검소한 사람인 거 같아."
"... 네?"
평범한 대화중에 나온 뜬금없는 말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검소한 사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욕심이 많은 편이라고 늘 생각했는데, 우연히 대화중에 튀어나온 '검소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나를 검소하다고 생각한 이유가 더 기억에 남는다.
" 왜, 다들 들고 다니는 가방 같은 것도 비싼 거 안 들잖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장 백화점에 가서 명품백을 사야겠다고. 내가 얼마나 검소하지 못한 사람인지를 보여줘야겠다고.
근무 년수가 차기 시작하면서 나도 슬슬 나도 좋은 가방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의를 차려야 하는 자리 나 결혼식 등에 들고 다닐만한 깔끔한 디자인에, 어느 옷에나 무난히 어울리지만, 또 누가 봐도 소위 명품 브랜드에서 샀구나를 알아볼 수 있는 그런 가방 말이다. 나는 언제든지 명품백을 사는 데 열려있었다. 다만 초반에는 차가 없으니 비 오는 날 온몸으로 가방을 감싸 안고 출근할 자신은 없어서, 차가 생긴 후에는 이미 유학 계획이 구체화되기 시작해서 사놓고 이 년을 집에만 모셔만 놓을까 봐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검소한 사람이었던 건 아닌 게, 나는 여행을 즐기는 편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는 것도 좋아한다. 사랑하는 동생 대학 졸업 선물로 악마가 입는다는 브랜드에서 가방을 사줬고(소위 말하는 명품백이었다.), 어버이날 선물로 매년 가전제품을 하나씩 바꿔드린다. 지금 나는 이 년간 유럽에 살면서 등록금과 비싼 월세를 내느라 명품백의 열 배쯤 되는 돈을 깨부수고 있는 중이다. 그런 내가 고작 '명품백'이 없다고 검소한 사람이 되다니. 정말 억울하다 억울해.
명품백이 사치나 허영의 대명사가 된지는 꽤 오래된 일이다. 내가 대학생 때도 '명품백'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목에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10년이 되도록 명품백은 참 많은 미움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주변에 명품백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내 지인들이 모두 사치스럽다거나 허영심이 강한 사람들인 건 전혀 아니다. 아마 명품백을 힘주어 욕하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다들 해당 브랜드의 물건을 하나쯤 가지고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누군가 선물로 관련 제품을 준다면 분명 입이 찢어져라 웃을게 분명하다.
명품백이 무슨 큰 죄를 지었다고 그렇게 미워하나.
항상 현명한 소비만 하고 살 수는 없다. 대형 마트 세 곳에 전통시장까지 돌고 돌아 물건의 품질, 가격, 원산지를 모두 비교하고 산다거나 리뷰를 100개쯤 읽어보고 인터넷에서 믿을만한 제품을 주문하고 하는 것도 좋겠지만, 살아가다 보면 충동구매도 하고 가끔은 멍청비용을 내기도 하며 사는 것이다. 그때마다 나를 충동적인 사람, 멍청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명품백도 우리가 사는 수백수천 가지의 물건 중에 고작 하나일 뿐이지 사람에 대해 정의하는 수단이 아니다.
내 생각은 그렇다. 누구나 좋아하는 게 있다고. 취향은 제각각일지라도 어쨌든 저만의 소유욕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누군가는 문화생활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레저활동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명품백을 좋아할 수도 있는 거다. 가끔 킹크랩을 먹고 싶은 날이 있는가 하면 말린 멸치와 맥주 한 캔에 행복한 날도 있는 거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하고, 안 먹고, 안 입고, 대신 통장에 찍힌 동그라미만 봐도 행복해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저 사람 따라, 그 날의 기분 따라 다를 뿐이다.
그런데 그런 속을 들여다볼 생각은 안 하고 그저 가방을 고가의 브랜드에서 구입한 사람이라서 사치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건 그냥 사람들을 쉽게 묶어 욕할 수 있는 구실을 찾아낸 것뿐이다. 논리 정연한 척, 비난이 아니고 비판인 척, 특정하지 않은 타인에게 가해하고 싶을 때 휘두를 수 있는 무기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은 자가용 대신 버스와 지하철만 이용해야 하고, 옷은 시장표 티셔츠에 면바지, 식사는 밥에 김치만 먹고살아야 한다. 과연 그들은 삶의 최소한의 요건만 충족되면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 글은 소비에 대한 옹호라기보다는 무분별한 혐오에 대한 반항이다. 타인의 선택을 우리의 잣대대로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타인이 우리의 눈에 만족스럽게 살도록 강요할 수는 더더욱 없다. 사람들이 조금 더 너그러워졌으면 좋겠다. 덜 흥분하고, 옳고 그름을 차분하게 생각할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늘 그래 왔던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