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비아의 국경일로 가득 찬 11월
누군가에게는 이름도 생소할 나라인 '라트비아'. 라트비아로 유학을 떠나 1년을 생활해보며 라트비아의 많은 것들을 보고 느꼈으나, 가장 감명 깊었던 것 중의 하나는 라트비아의 근현대사와 이들의 역사의식이다. 라트비아의 근현대사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다.
라트비아는 끊임없이 주변국에 침략을 받았다. 독립을 선언하기 전까지 독일, 러시아,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고 그 긴 세월 동안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내 결국 지금의 라트비아가 되었다. 가끔은 주변국에 의해서 같은 라트비아 국민들끼리 서로에게 총을 겨눠야 하기도 했다. 1918년 독립 선언 이후 침략해온 독일과 러시아에 의해 강제 징집된 이들이 서로 전투를 벌여야 했으나, 라트비아 인들은 결국 자신들의 군대를 결성해 라트비아를 수복했다. 1940년 소련에 의해 15번째 공화국으로 강제 합병되었던 당시 많은 라트비아 인들이 자유를 찾아 라트비아를 떠났지만, 재독립선언 이후 또 돌아와 자신들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 가지 독특한 점은, 발트 3국으로 불리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서로 사이가 좋고 협력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EU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렇기는 하지만, 세 나라는 소련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일 때 다 같이 발트의 길이라는 비폭력 독립운동을 펼쳐 국제 사회의 관심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독립에 대한 자신들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코로나로 국경을 닫았던 지난봄에는 상황이 호전된 후 발트 3국끼리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가장 먼저 국경을 열어주기도 했다.
라트비아의 역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작년에 라트비아에서 지내며 국경일이 모여있는 11월, 재 독립일이 있는 5월을 지나며 라트비아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라트비아의 국경일이 다가오면 라트비아의 온 거리에는 라트비아 국기가 걸리고, 라트비아의 트롤리버스, 트램, 버스들은 머리에 작은 라트비아 국기를 달고 도로를 달린다.
라트비아의 독립과 관련된 대표적인 기념일은 11월 11일 Lāčplēsis의 날(곰을 찢는 사나이의 날, 독일, 러시아 군과의 전투에서 리가를 지켜낸 전투를 기념), 11월 18일 라트비아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 of Latvia, 1918년 라트비아가 독립을 선언한 날을 기념), 5월 4일 화요일 재독립기념일(Restoration of Independence of Latvia, 1990년 라트비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날을 기념)이 있는데, 역사적인 순서대로 정리하면 이렇다.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 독립 선언 (독립기념일)
1919년 11월 11일 독일, 러시아 군과의 전투에서 리가를 지켜낸 전투 (Lāčplēsis의 날)
1940년 8월 5일 소련의 15번째 공화국으로 강제 합병
1989년 8월 23일 Baltic Way
1990년 5월 4일 재독립선언 (재독립기념일)
간단히 요약하면 1918년 11월 18일 라트비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같은 해 12월 7일 초대 대통령인 Jānis Čakste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하지만 독립을 선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라트비아는 독일-러시아 군에게 침략을 받게 되는데, 많은 전투 끝에 1919년 11월 11일 라트비아 군대가 독일, 러시아 군으로부터 리가를 지켜내게 되었다. Lāčplēsis Day는 이날의 전투를 기념함과 동시에 라트비아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많은 분들을 기리는 날이다. 어찌 보면 전쟁에서 이긴 날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라트비아라는 작은 나라가 독일과 러시아라는 큰 나라들에 맞서서 조국을 지켜냈다는 건 이들에게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나라를 지켜낸 라트비아는 1940년 소련에 의해 15번째 공화국으로 강제 합병되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라트비아는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는데,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국민 200만 명이 참여해 세 나라를 가로지르는 675.5km의 긴 인간띠를 만든 Baltic Way가 있다. 끊임없는 노력 끝에 1990년 5월 4일 라트비아 의회는 투표를 통해 라트비아의 재 독립을 선언하고, 당시 국회의장 격이었던 Chairman of supreme Soviet 직의 Anatolijs Gorbunovs가 임시 대통령직을 맡게 된다.
지금도 라트비아 리가에 사는 사람들이 11월 11일이 되면 모두 리가 성으로 나와 촛불을 밝힌다. 라트비아의 한강 격인 다우가바 강과 리가성 사이로 수없이 많은 촛불들이 밝혀지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라트비아의 국가를 부르기도 한다. 보통 이 날에는 라트비아 국립도서관 옆에 간이 무대를 설치하고 작은 콘서트를 갖는다.
11월 23일 독립기념일에는 아침에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 각 국의 주 라트비아 대사관에서 일하는 외국인 대사들, 라트비아에 파병된 군인들 등이 모여 자유 기념비 앞에 꽃을 놓는 행사를 갖는다. 이후에는 군대 퍼레이드, 밤이 되면 횃불을 달리고 올드타운 안을 달리는 행사가 있다. 이때에는 정말 올드 타운 안이 횃불을 밝히기 위해 나온 라트비아 사람들로 가득 찬다. 그리고 다우가바 강 위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로 독립기념일 행사를 마무리한다.
재독립기념일은 1990년 5월 4일 당시 소비에트 공화국인 라트비아 의회에서 라트비아 독립 선언이 가결되면서 라트비아가 정식으로 하나의 나라로 독립하였음을 선포한 날이다. 분명 다른 때에는 행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올해는 자유 기념비 앞에 대통령이 몇몇 수행원들과 함께 꽃을 놓는 행사로 축소되었다. 나는 우연히 조깅 가는 길에 현장을 목격하고 라트비아 대통령을 코앞에서 볼 수 있었다.
올해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서 많은 행사들이 취소되거나 축소되었다. 하지만 작년에 라트비아에서 위 행사들을 직접 목격했던 내게는 라트비아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나라를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라트비아라는 나라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분명 이름조차 낯선 나라겠지만, 알면 알수록 매력이 넘치는 나라라는 걸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