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비아 말을 못 하는 시장 후보

라트비아와 러시아,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들

by SUR

"내가 웃긴 동영상을 봤어."


라트비아인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고 함께 이야기하며 시간을 가지고 있는데 한 친구가 말을 꺼냈다. 그러고는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서 영상을 보여준다. 얼마 전에 있었던 지방 선거에서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의 시장직에 출마한 후보가 요리를 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영상이었다. 티브이 쇼의 호스트는 라트비아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유명한 이탈리아인 셰프였고, 그 시장 출마자는 라트비아 국적의 라트비아인이었다. 쇼가 라트비아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뭐가 웃기다는 건가 하고 친구를 쳐다봤더니 친구가 설명을 시작했다.


이 이탈리아인은 라트비아에서 산지 6-7년 정도 되어서 라트비아어를 완벽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잘하는데, 이 시장 출마자는 라트비아 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고 한다. 유권자인 라트비아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티브이 쇼에 나왔는데, 라트비아 말을 하나도 하지 못하니 그 셰프가 재료를 설명하거나 질문을 던질 때마다 그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 밖에 못한다는 것이다. 나름 라트비아 말을 2-3개월 정도 배운 경력이 있는 내가 보니 이 후보는 간단한 '연어'같은 단어도 라트비아 말로 전혀 하지 못하고, 겨우 간단히 'Ja' 우리말로 네, 라는 반응만 하고 허둥거리고 있었다.


라트비아 사람인 친구들은 그냥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외국인이지만 라트비아를 참 좋아하는 나는 왠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라트비아가 소련에서 1990년 독립한 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다. 크게 부의 재 분배도 그렇고, 언어, 정치적 문제도 그렇다.


라트비아의 부자는 대부분 러시아 인들이다. 소련에서 라트비아가 독립한 후에 라트비아 현지 사정에 밝은 러시아인들은 라트비아에 남아 사업을 하며 큰 부를 축적했다. 라트비아 인들의 불만은 이들이 라트비아에서 평생을 살고 라트비아에서 돈을 벌지만 라트비아 말은 한마디도 못하고, 라트비아 국적을 취득할 생각도 없다는 것이다. 라트비아의 경우 250,000유로 이상(환율에 따라 다르지만 우리나라 돈으로 약 3억 원)의 주택을 구입하면 거주 허가증이 나오고, 주택 소유 기간 5년을 유지하면 영주권을 얻을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수도인 리가의 시티 센터나 리가에서 기차로 40분 정도 떨어져 있는 라트비아의 부촌인 유르말라의 고급 주택에서 모여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라트비아의 극빈층도 많은 이들이 러시아 출신이다. 과거 소련 철도청 등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던 이들이 라트비아 독립 당시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현재 그들의 자식들이 무국적자로 라트비아 땅에 살고 있는 경우이다. 이들은 과거 철도청이 있었던 '마스카바스'라는 곳 주변에 살고 있는데, 대부분 일정한 수입을 갖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 등의 문제를 가진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마스카바스'는 수도인 리가의 한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라트비아 사람들도 가기를 꺼리고, 혹시나 가더라도 밤에는 절대 밖에서 돌아다니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지역이 되었다. 이 지역에서 자잘한 사건 사고가 많다 보니 리가에서 집을 구할 때도 보면 이 마스카바스지역은 월세나 집값이 상대적으로 훨씬 저렴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언어의 문제도 있다.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에서는 60퍼센트 정도의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쓸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중장년층은 대부분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데, 소련에 편입된 당시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가르쳤을 테니 집에서는 라트비아어를, 학교에서는 러시아어를 쓰며 자연스럽게 두 언어를 모두 습득했을 거다.


문제는 이후의 세대이다. 소련에 편입되어 있던 당시 라트비아 사람들 중 러시아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이 많아 이들의 자녀인 내 또래 세대들의 경우 라트비아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러시아계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 러시아어밖에 못하는 러시아인과 라트비아 말과 러시아어를 둘 다 하는 라트비아인이 결혼을 하면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러시아어를 쓰게 되고 아이들이 그대로 러시아어를 습득하게 되어 아이가 학교를 들어간 후 라트비아어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


실제 내 라트비아인 친구들 중 절반은 라트비아 말을 거의 못 한다. 내 친구들이 대부분 라트비아 국제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는 영국에서 나온 경우가 많아서 더 그렇다. 그들 중 절반은 영어와 러시아어에 유창하고, 나머지 절반은 가족이 전쟁을 피해 다른 나라에 이주했다 돌아온 경우라서 해당 국가의 언어와 영어를 사용한다. 집에서는 러시아어나 다른 나라 말을 사용하고 학교에서는 영어를 사용했기에 실제 라트비아 말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아얘 갖지 못한 것이다.


반면 라트비아 말을 할 수 있는 나머지 절반의 친구들 대부분 러시아어에 유창하거나 아주 잘하지는 못해도 듣거나 말하는데 불편하지 않은 수준 정도로 구사할 수 있다. 라트비아에서 살다 보면 러시아어를 접할 일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습득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친구들은 라트비아 사람들이지만 서로와 대화를 할 때에 모두가 구사할 수 있는 영어를 사용한다. 처음에는 영어도 잘하고 러시아어도 할 수 있다길래 참 부러웠는데, 라트비아에서 지내며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나서는 라트비아 사람들이 라트비아 말을 전혀 못한다는 게 안타깝기도 했다.


그래서, 시장 후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이 후보 역시 라트비아에서 나고 자란 라트비아 사람이지만 가족이 러시아계이고, 소속 정당 역시 러시아에 우호적인 정당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독립한 후 일본의 잔재가 많이 남았듯, 라트비아에도 여전히 러시아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어서 정치권에도 친러 성향의 정당이 있고, 이들을 지지하는 러시아계 라트비아 인들도 많아서 그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꾸준히 정치활동을 유지하고 있다. 내 기준에서는 아무리 친러 성향이 강하더라도 어떻게 모국어도 못하는 사람을 시장 후보로, 그것도 그 나라 수도의 시장 후보로 내세울 생각을 했을까 내 기준에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실은 이 문제를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게, 소련에 편입되어있는 동안 이미 경제적으로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버렸고 그렇다 보니 라트비아와 러시아는 무 자르듯 딱 잘라내기에 어려운 부분이 많다. 특히 나라 간 이동이 자유로운 유럽의 특성상 여러 이유로 다른 나라로 이주해서 사는 경우가 많은데, 라트비아의 경우 주변국들이 다 구 소련 국가들로 비슷한 상황이다 보니 이주민들이 모두 러시아어를 사용해서 라트비아 내 러시아어 사용률이 더 올라가는 것 같다. 유럽 내 주변국뿐만 아니라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사람들도 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로 이주해 직장을 구하고 러시아어를 쓰며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이들을 밀어내려고 하기보다는 함께 융화시켜서 살아가야 하다 보니 이 문제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오게 된 것 같다. 자신의 색깔을 잘 지켜나가며 이곳에 정착하게 된 다른 이들이 라트비아에 대해 보다 많이 배우고 잘 적응해 나가도록 하는 게 현재의 라트비아가 가진 숙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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