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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R Dec 14. 2020

아보카도를 키우며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했다.

아무렇게나 자라나도 나는 너를 사랑해

"싹이 말라버렸어."

나는 마음 아픈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 봄 아보카도 한 묶음을 샀다. 그걸 다 먹어치우느라 온갖 아보카도 요리를 만들어먹었는데, 먹은 후면 항상 외롭게 남은 씨앗을 버리는 게 좀 마음이 쓰였다. 원래 내 몸 하나 간수하기에도 힘에 부치는 사람인지라 무얼 키운다는 것은 시도조차 꺼리던 내가 그 날 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씨앗의 싹을 틔우고 싶어졌다. 식물을 키우는데 재주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검색을 해서 여러 후기를 조사한 끝에 씨앗에 이쑤시개를 꽂아 그럴듯하게 발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놓고, 아직 싹도 나지 않은 걸 혼자 보기만 해도 배불러했더랬다.


물에 담가 두었던 두 개의 씨앗은 이주쯤 지나자 반으로 갈라지더니 차례로 하얗고 통통한 뿌리를 내렸다. 조금 더 기다리니 갈색에 붉은빛과 연두색이 섞인 싹이 머리를 삐죽 내밀었고, 나는 그런 아보카도들에게 이름도 붙여주며 애지중지했다. 화분과 흙을 사다 분갈이도 해주고 아침저녁으로 시간 날 때마다 쳐다보며 조금이라도 시들해 보이면 네이버며 구글 등 온갖 검색창에 한글과 영어로 검색해가며 파릇파릇 살려내기 위해 애를 썼다. 분갈이를 해주다 길게 났던 뿌리를 반으로 동강 잘라먹는 실수를 했어도 나는 결코 이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로 싹을 틔운 아보카도의 싹이 말라버렸다. 나는 속상한 마음에 여기저기 하소연을 했고, 그러고도 포기하지 못해서 한동안 싹이 말라 반으로 쪼개진 씨앗만 남은 화분에도 꾸준히 물을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말라버린 싹 양쪽으로 새로운 싹이 돋았다. 두 싹은 나란히 자라는가 싶더니, 조금 발육이 늦은 싹이 또 말라버리고 하나 남은 싹이 쑥쑥 자라 제법 튼튼한 식물다운 모습을 갖춰나갔다.


뒤늦게 난 싹은 다소 못생기게 자라났다. 본래 난 싹이 아니라 곁가지가 본 줄기 노릇을 하고 있는 탓에 아무 탈 없이 쑥쑥 자라는 다른 아보카도와는 달리 줄기는 삐뚤삐뚤 자라고 잎의 크기도 작았지만, 그래도 나는 좋았다. 아보카도가 포기하지 않고 새 싹을 틔워내 준 게 고마웠고, 저도 아보카도라며 초록색의 제법 넓적한 잎을 돋아내는 게 장했다. 갖은 위기를 겪어내면서도 쑥쑥 자라나는 아보카도들을 보며 생각했다. 반려 식물일지언정 한 생명을 내 손에 쥐고 키워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가끔 화분을 사곤 했다. 오래 키울 자신은 없어서 오래 살 수 있는 나무 대신 그냥 예뻐 보이는 꽃이나 잘 죽지 않는 다육 식물로.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인 화분 속 식물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누구 잎이 더 예쁘게 났는지, 누구 줄기가 더 튼튼해 보이는지를 따지고 또 따져서 개중에 제일 잘나 보이는 식물을 간택하곤 했다. 그 당시 나에게 이들은 반려 식물이라기보다는 그냥 기분에 맞춰 집에 하나 들여본 삼천 원짜리 장식품 하나같은 느낌이었다. 텅 빈 내 공간 속에 홀로 자연의 색을 띤, 그래서 가끔 바라보면 내게 힘을 주는 그런 장식품. 물론 내가 그 식물들의 힘을 너무 쪽쪽 뺏어먹은 탓인지 으레 여섯 달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가기 십상이었지만, 나는 미련 없이 그들을 보내주고 금세 잊어버렸다.


이번 아보카도들은 조금 달랐다. 열매였던 시절 직접 갈라 이들을 꺼내고 물로 씻고 껍질을 벗겨 싹을 틔운 탓인지 이전의 식물들과는 또 다르게 마음이 많이 갔다. 예쁘고 튼튼한, 잘난 것만을 고집해 기르던 나는 실수로 뿌리가 끊어져도, 싹이 말라버려도, 못생긴 잎을 돋고 줄기가 이리저리 휘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조금씩 자라는 게 그저 고마웠다. 줄기 끝에 새 잎이 돋고 키가 조금 자랄 때면 친구들을 붙들고 내 아보카도 사진들을 보여주며 십 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아보카도 수확 계획을 늘어놓곤 했다.


부모의 마음이 이런 걸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보카도들을 보며 어떻게 생겨도, 어떻게 자라도, 그저 상관없이 예쁘고 기특했던 내 마음을 돌이켜 보면서, 나를 키울 때 우리 부모님은 이런 생각을 했을까. 특출 나게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개중에 가장 예쁘지 않아도 그냥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고, 부족한 것 없이 뭐든 해 주고 싶었을까. 화분 속 식물처럼 나는 그저 받기만 하는 존재였지만, 그렇게 아무렇게나 자라나도 나를 사랑했을까.


아빠가 그런 소릴 한 적이 있다. 아빤 너흴 키울 때 재미있었다고. 내가 태어난 지 사 개월쯤 지나 처음 만난 날, 그 조그만 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 사람은 누굴까'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게 그렇게 귀엽고 좋았다고. 그때 나는 '아빠, 아기는 원래 다 귀여워.' 하고 그 말에 들어있는 마음을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귀여운 아기들을 한 줄로 쭉 늘어놓아도 가장 눈에 들어오고 예쁜 게 내 새끼가 아닐까. 그 조그만 게 점점 자라고 잘못을 하기도, 사고를 치기도, 사춘기가 와 부모의 한마디 한마디에 그냥 지나가는 법 없이 불평을 해도, 그게 재밌고 좋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였다는 걸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내가 반려 식물을 들이고 키우는 마음을 감히 부모 마음에 빗댈 수는 없겠지만, 서른이 되어서야,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부모들이 모이면 자식 자랑밖엔 할 일이 없다고 하는지. 왜 단톡 방에서 그렇게 아이 사진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지. 고작 아보카도 두 그루를 키우며 이리 저리 매일 사진을 찍어대고, 온갖 군데 자랑을 하고 나서야 조금,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내가 과제 때문에 바쁘다고 하면 방해가 될까 먼저 전화는 못하면서도, 또 어떻게든 틈이 나면 목소리 한번 듣고 싶어 했구나, 싶어서 마음도 아팠다. 부모와 자식 사이라는 게, 얼마나 불평등한 관계인가.


그러고 나니 못본지 정말 일년이 다 되어가는 부모님이 보고싶어진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그저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지난 일을 떠올리게 되고, 마음이 쓰이게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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