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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R Dec 17. 2020

시험을 망쳤다.

그리고 나는 내 기분에 직면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시험을 망쳤다.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결과를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상하게 시험 문제가 화면에 뜨는 순간 문제를 읽는 것조차 힘들었고, 아무리 애써도 문제들이 전혀 이해가 안 됐다. 그냥 검은색 꼬부랑 거리는 건 글자고 하얀 건 화면인데,  해석을 할 수가 없었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진 시험을 마치고 나서 녹초가 된 나는 침대에 누웠다가,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몰아보기 시작했다. 시험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밀려든 이 기분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이런 기분은 정말인지 익숙하지가 않아서, 회피형인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이 기분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두 시간쯤 보내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내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이 기분이 뭔지에 대해서 직면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렇게 무력한 기분이 마지막으로 든 게 언제였는지 생각해본다.




초등학교 때 나는 늘 중간은 하는 아이 었다. 특출 나지도 않았지만 크게 못하지도 않는. 시험을 보고 나면 아주 잘하지는 않은, 꼭 한두 개쯤 실수를 하지만 그래도 뭐 나쁘지 않았다. 중학교 때의 나도 비슷했다. 여전히 그냥 자기 할 일 정도는 하는, 그렇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고만고만한 아이. 고등학교 땐 공부를 제법 잘했다. 그땐 공부만 하고 살았으니까, 잘했어야만 했다.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서 씻고 다섯 시 반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밤 열두 시까지. 열심히 살았고 그만한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해야 할 필요가 없게 느껴졌으니까. 다시 예전처럼 중간쯤 하는 학생이 되었고, 그렇게 졸업을 해서 교사가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늘 중간은 하던 사람이었던지라 이렇게 망했다는 기분에 익숙하지가 않다. 사실 유학을 오고 나서, 엄청나게 수준 높은 대학원을 다니는 게 아니면서도 나는 처음엔 번번이 좌절을 맛봤었다. 언어의 장벽은 높았고 6년간의 공백은 갓 대학교 졸업 후 대학원에 들어온 친구들과 나 사이에 생각보다 많은 수준 차이를 만들었다. 한국과는 또 다른 교육적 환경도 만만치 않은 어려움이었다. 나는 제법 똑똑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구나를 느끼는 순간은 한 학기에도 여러 번씩 나를 찾아들었다. 그래서 나름 유학을 온 후 많은 일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다.


열심히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자라면서 보니 열심해해서 안 되는 건 없길래, 뭐든 최선을 다 해서 하면 이룰 수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게 아니더라.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과정은 아무 소용없는 게 요즘 세상이다. 내 시험 결과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래서 이 기분에서 벗어나는 게 더 힘들다. '열심히'라는 것의 한계를 처음으로 온몸으로 체감하게 되어서.


행동주의 이론에 보면 강화 원리라는 게 있다. 긍정적인 행동에 대해서 보상을 주고, 부정적인 행동에 대해서 처벌을 주면서 훈련을 시키면, 개인이 보상을 위해서 긍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는 원리다. 흔히 우리가 강아지를 훈련시킬 때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잘하면 간식을 주는. 공부와 결과에 대한 강화는 내 경우 고등학교 때에 집중되어 있었고, 열심히 하면 성적이라는 게 뚝 떨어지는 거라고 체득했었는데, 이번 시험은 그렇지 못할 것 같다. 훈련에 열심히 임했는데 간식을 얻지 못한 강아지처럼 기분이 참 씁쓸하다.


그러니까 지금 나의 기분은 내가 그렇게 똑똑하지 않다는 현실을 마주한 슬픔과, '열심히'의 한계를 경험한 무력함, 제대로 된 강화를 얻지 못한 허탈함이 뒤섞여 있다. 흔히 석사 학위 정도는 받은 사람이 많길래 나도 이 년 동안 학교를 다니면 거저 얻을 수 있는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더 어깨가 처졌다. 남들은 다 잘 해내던데 나는 이렇게 힘들어하는걸 보니 내가 못난 것 같아서. 내가 앞으로도 석사라는 타이틀 하나를 받기 위해서 이런 기분을 몇 번은 더 겪겠구나, 싶어서.


그러나 나는 또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 보려고 한다. 이곳에 글로 내 속상한 마음을 중얼중얼 토로해 놓았으니, 이제 그 감정은 놓아주고 내 할 일을 해보려 한다. 이 또한 경험이겠지. 내가 성장하는 과정일 테고 시험을 망친 아이들의 기분에 더 공감해 줄 수 있는 기회게 있겠지, 하고 좋게 좋게 생각해 보려 한다. 혹시 내 글을 읽은, 시험을 앞둔 누군가가 있다면, 내가 당신 대신 모든 액땜은 해 두었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임해서 좋은 결과를 많이 얻으시라는 좋은 마음도 함께,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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