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사람의 얼굴은 반짝인다.

인풋의 시기를 기억하며

by 다헨님

인풋의 시기가 있다. 아웃풋을 쏟아내기 전, 마치 전조처럼 몰아닥치는 배움의 시기가.


몇 해 전부터 나는 갑자기 조금씩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인터뷰에 응하거나, 세미나를 진행하거나, 강연자로 초대받았다. 큰 자리는 아니었지만, 나에게 무언가를 듣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엔 몹시 어색했다. 나는 늘 듣는 사람에 가까웠으니까. 검색창에 끊임없이 질문을 넣고, 말 잘하는 사람들의 어휘를 옮겨적고, 프로그램 포스터를 저장해두는 사람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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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뒤에 있던 사람이었던 나를 앞에 세워 준, 폴인 라이브 세미나...!


그때는 몰랐다. 내가 언젠가 말하는 사람이 될 거라는 걸. 단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누구도 나에게 시키지 않았지만, 퇴근 후엔 미디어센터의 무료 강의를 들었고, 김민식 PD의 블로그를 정독했고, 영상미학 책을 찾아 읽었다. 영화평론 강의가 있다는 걸 우연히 알았을 때, 일주일에 한 번씩 8주 동안 빠짐없이 출석했다. 누가 보라고 한 적도 없는데, 내 안에 마감처럼 강한 추진력이 생겼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집에 와 씻고 밥 먹고. 그렇게 끝나면 너무 삶이 작아지는 것 같아서, 자꾸 어딘가를 기웃거렸다. 한겨레 문화센터, 서울 아트시네마, 미디액트, 국립현대미술관…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지만 나는 늘 그 앞에 서 있었다. 문화 프로그램 하나를 찾으면 메모장에 정리하고, 지원서를 냈고, 발표를 기다렸다. 누가 봐도 과한 몰입이었다.


궁금한 게 많아서 직장인 트렌드 모임도 직접 만들었다. 자기 분야의 트렌드를 매주 돌아가며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나중엔 친해졌고, 그중 몇 명은 지금도 연락한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그렇게 무언가를 알고 싶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가 좋아하는 일이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를.


도서관도 참 자주 갔다. 구립 도서관의 '신간' 코너는 그 시절 나의 설렘이었다. 동그랗게 둘러진 진열대,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걷는 통로. 책을 전부 읽지는 않았지만, 그 앞에서 나는 늘 두근거렸다. 책등의 제목, 저자의 이름, 표지의 질감. 그 시절, 누군가 책 제목을 말하면 저자와 출판사를 외워서 맞히는 게 가능했다.


그땐 그런 사람이었다. 몸이 피곤해도 차를 끌고 도서관에 가서 '최대 대출권수'를 채우고 나면, 세상을 공짜로 사는 기분이었다.


그 무렵엔 돈이 되는 일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재테크나 부업보다 '이걸 더 잘할 수 없을까?'라는 고민이 훨씬 컸다. 회사 안에서 나의 업의 본질이 무엇인지, 어떤 눈으로 일을 바라봐야 하는지, 그 고민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랐다.


요즘은 그 시절을 돌아보며 자주 생각한다. 그게 내 인생의 '인풋의 시기'였다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아웃풋은, 그 시절의 배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나는 그런 시기를 기억하는 사람이고 싶다. 누군가 나에게 "그때 왜 그렇게 열심이었어요?"라고 묻는다면, 뾰족한 대답은 없지만, 단지 그게 너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을 이해하고 싶었고, 내가 이 일을 왜 좋아하는지를 더 알아보고 싶었던 것.


배우는 사람의 얼굴은 항상 반짝인다. 그 얼굴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내 얼굴이 그랬던 적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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