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감정을 지키는 법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오는가, 기획자의 감각 훈련기

by 다헨님

일과 감정 사이, 기획자로 오래 남고 싶어서

콘텐츠를 만들며 ‘좋아하는 마음’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내가 감동하는 방식, 감각을 다듬는 습관, 그리고 콘텐츠 기획자로서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일에 관하여



나는 아이디어가 '번뜩' 떠오르는 순간을 믿지 않는다. 대신, 오래 쌓이고 천천히 배이는 감각을 믿는다.

무언가 떠올려야 한다며 급하게 레퍼런스를 찾기 시작할 때. 유튜브 알고리즘에 휘말리고, 핀터레스트를 끝없이 스크롤하다가 ‘영감’이라는 이름을 씌우는 그 순간이 나는 어쩐지 불편하다. 그건 마음이 비어 있다는 걸 외면하는 방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방식에서 진짜 감동이 온 적은 없었다. 나는 ‘이미 완성된 것을 흉내 내는 일’에서 영감이 시작될 수 없다고 믿는다. 아이디어는 복사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따라 발견되는 것이다.


감각은 '좋아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진짜 영감은, 내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더듬는 시간에서 시작된다.
요즘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어디에 오래 머물러 있는가?
무엇을 반복해서 돌려보고, 어떤 장면 앞에서 스크롤을 멈추는가?

그 '끌림'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의식적으로 움직인다.

좋아하는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고, 내가 사랑하는 시인의 시를 낭독한다. 강의실 구석에 앉아 미학 강좌를 들으며 노트를 꾹꾹 눌러 쓰고, 작사 수업에서 딱 그 음절에 맞는 단어를 찾기 위해 오래 고민한다. 예술도서관에서는 사진집을 펼쳐든다. 팀 워커, 넉 골딘, 라이언 맥긴리, 아라키 노부요시. 그들의 정서는 모두 다르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본다. 그건 선명한 태도였고, 나는 그들의 감정을 사진 한 장으로도 알아챌 수 있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AS-250616_SC2-IMG01.jpg 요즘은 ‘영화감독의 눈’과 ‘촬영 미학’에 빠져 있습니다.지난주에 산 책과 최근에 배운 것들.


목공이 내 감각을 지켜준 이유

그리고 내 감각을 가장 단단하게 지켜준 훈련은 의외로, ‘목공’이었다. 토요일 오전마다, 목공소에서 손에 따뜻한 머그를 쥐고 앉아 우리는 ‘1분 스피치’를 했다. 지난 일주일을 1분 안에 정리해서 말하는 작은 리추얼이었다.

“외국인 모델에게 디렉션하려고 몇 가지 영어 표현을 외워 갔어요.”

“촬영 끝나고 평일이 아니면 못 가는 줄 서는 맛집에서 덴푸라동을 먹었어요.”


그렇게 일상을 말로 꺼내보면, 그냥 지나간 하루 안에도 꼭 반짝이는 장면이 있었다. 스피치가 끝나면 나는 샌딩을 시작했다. 세 시간 넘게 무념무상으로 나무를 갈고 다듬다 보면, 막혔던 기획이 풀리고 아이디어가 다시 살아났다. 내 머릿속엔 기름이 떨어져 있었지만, 나무결을 따라 손을 움직이다 보면 다시 불이 붙었다.


AS-250616_SC2-IMG02.jpg 목공소에서 직접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만든 책상



감정을 되찾기 위한 감각의 루틴

기획자로 일하다 보면 피로가 쌓인다.
“전환율을 높여라.”
“잘 팔리게 만들어라.”

지나치게 단순한 목표 앞에 감정은 닳고 감각은 무뎌진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일과는 상관없는 시간, ‘좋아하는 것을 감지하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만든다. 나는 영화보다 감독의 인터뷰를 좋아하고, 시보다 시인을 좋아하고, 노래보다 가사의 구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게 나라는 사람의 결이다.


어느 날, 시 낭독 모임에서 한 참여자가 조심스레 자작시를 나눠줬다. 낭독이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그건 나에게 너무도 선명한 감동이었다. 진심은 결국 닿는다.


나는 그 이후로 ‘감동한 기억’을 작업의 뿌리로 삼기로 했다.


AS-250616_SC2-IMG03.jpg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한강에서 조용히 시를 나눈 저녁


감동은 방향이 된다

새로운 기획을 짤 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요즘은 뭐에 감동했어요?”


그 질문은 내 작업의 방향이 되어준다. 좋아하는 마음을 지켜야, 오래 좋아할 수 있고, 좋아하는 사람만이 결국 감동을 줄 수 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말했다.


“촬영장 문은 항상 열어 놔야 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절대 알 수 없으니까.”


그 예측 불가능한 마법을 맞을 준비를 하려면, 그 전에 나에게도 여유와 감각이 남아 있어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만이 감동을 줄 수 있다

나는 정시 퇴근이 가능한 날이면 좋아하는 평론가를 만나러 간다. 책을 들고 나가고, 좋아하는 작가가 추천한 작곡가의 음악을 밤에 틀어 놓는다. 사실은 이 모든 게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준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서 더 많은 것이 나온다. 나를 끌어당기는 정서, 내 안에 남아 있는 말들, 어쩌면 미처 감당하지 못한 감정까지. 그걸 잘 읽어두어야 한다.


지금도 나는 내가 만든 콘텐츠를 여러 번 돌려본다. 완성된 영상도, 웃긴 씬도, 어정쩡한 컷도 다시 본다. 내가 만든 작은 세계가 계속해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눈을 떼지 못한다. 그 애정이 있어야, 다음 콘티를 만들 힘도 생긴다.


나는 대체되지 않기를 바란다. AI보다 더 무서운 건 감각 좋은 후배들이니까.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내 것이다. 그건 흉내 낼 수 없고, 단기간에 쌓을 수 없는 것이니까.


감정의 정체를 들여다보고, 감각의 뿌리를 확인하며, 나는 오늘도 조금 더 단단해진다.
내일도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기 위해 살아간다.



✍️이 글은 더 긴 칼럼 버전으로도 정리해 두었습니다.

일과 감정 사이, 기획자로 오래 남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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