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상처
Do you know 하이라이스?
카레라이스가 아닌 하이라이스 말이다. 블로그, 유튜브, 인스타 등 온갖 미디어에서 음식 얘기를 하는, 음식에 미친 나라의 국민으로서 뭐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지도 모르겠다. 개중에 도전적이고 얼리어답터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면 먹어도 봤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하건대 내 또래의 사람 중 나보다 하이라이스를 빨리, 그리고 많이 먹어본 사람은 없지 않을까 한다.
내가 하이라이스를 접한 건 무려 혼돈의 20세기 말이다. 뭐 딱히 놀랄 일은 아닌가? 하지만 그 당시 마주한 시커먼 국물은 가히 운동화에 바퀴를 단 ‘힐리스’급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이걸 먹어도 되는 건가? 왠지 방사능에 노출된 것만 같은 해로움이 느껴지는 비주얼이었으나 냄새는 좋았다. 그리고 요리의 장본인이 바로 아버지였기에 핏줄로 맺어진 굳건한 믿음으로 하이라이스를 먹었다.
솔직히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내 입맛엔 그냥 시커먼 카레였다. 아버지께서 “이게 바로 하이라이스라는 거야!”라며 자부심 뿜뿜하는 목소리로 만들어주셨기에, 뭔가 카레보다는 만들기 어려운 난이도의 요리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뭐... 그냥 시판되는 가루만 바꿔 넣었을 뿐...
하여튼 당시 아버지는 우리에게 자주 하이라이스를 해주셨다. 아버지는 오랜 자취 경력으로 나름 요리에 대한 감이 있었다. 라면 하나를 끓여도 그냥 끓이지 않으며 양파며 대파며 온갖 잡탕을 만들곤 하셨다. 솔직히 내 입맛에는 좋았으나 라면 스프의 맛과 향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순정 라면파인 어머니와 동생에게는 거센 반발을 샀었다.
그렇다. 사실 내가 하이라이스라는 신문물을 비교적 빠르게 접했다고 자부했지만, 아버지야말로 하이라이스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아버지 세대에 하이라이스가 유행했던 걸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나의 첫 하이라이스는 아버지를 통해 접한 것이었고, 아버지가 우리에게 요리를 해주기 시작한 이유와 시기는 바로... 20세기 끝자락에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알파벳 세 개, IMF 때문이다.
거대한 갈퀴가 한반도 전역을 쓸고 지나갔으며 그 거대하고 촘촘한 갈퀴에 수많은 대한민국의 가정이 쓸리고 찢겼다. 그리고 그 갈퀴에 우리 집도 찢겨나갔다. 국제통화기금 기관명을 초등학생을 비롯한 전 국민이 알게 되었으니, 당시 대한민국의 상식 수준은 참으로 높았다 할 수 있겠다.
그전까지는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출근했다가 밤늦게 돌아오셔서 얼굴도 보기 힘들었던 아버지. 그러나 IMF라는 놈이 나타나고부터 아버지는 집에 있는 날이 많아졌다. 대신 세상은 등가교환이라 했던가. 아버지가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짐과 반대로 가정주부로 있던 어머니는 밖으로 나가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나는 하이라이스를 접하게 된 것이었다. 솔직히 7공주 집안의 막둥이로 태어난 어머니는 요리에 그다지 소질을 나타내지 못했으며, 어머니 김치보다 손맛 좋은 이모들의 전라도산 김치에 젓가락이 몰리는 우리 집이었다.
그런 와중에 자취 짬빠 만렙인 아버지의 요리를 접하게 되었으니. 남자의 자취 요리법을 아는가? 남자의 자취 요리는 마치 부대찌개와 같다. 온갖 재료를 때려 넣는다. 근본이란 전혀 없지만 이상하게 맛있는 것. 나름의 조화와 균형 속에서 자극적인 맛! 당시 어린이였던 내 입맛에 안 맞을 리가 없었다. 매일 같이 유기농 풀때기만 먹다가 패스트푸드를 먹는 일탈과도 같았달까?
철없는 초딩이었던 난 자주 보지 못했던 아버지가 매일 같이 집에 있으니 그저 좋았다. 아버지가 직장을 잃었어도, 돈을 못 벌어도, 아버지는 내게 그저 친구 같은, 사랑스러운 아버지였다. 곰탕처럼 끓여대는 하이라이스는 질리지도 않았으며, 무럭무럭 자라나던 시기인지라 겨울철 제설작업 하는 군인처럼 끊임없이 밥을 퍼다 먹었다.
그렇게 아버지와의 시간에 만족하며 지내던 어느 날. 친구와 동네를 돌아다니던 중 길에서 아버지를 마주쳤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공사판 일용직 일을 구하러 나가곤 했는데, 일을 구하지 못하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날도 일을 구하지 못한 아버지는 남는 시간을 죽이고자 산에 갔다가 돌아오는 중이었다. 해가 쨍쨍한 오후. 당시 보통의 가장이라면, 과거의 아버지였다면 일을 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난 길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고,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아차.
난 바로 다시 아버지를 바라봤고, “아빠!”하고 불렀다. 옆에 있던 친구도 나의 호칭에 허리를 굽혀 아버지에게 인사했고, 아버지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우리의 인사를 받았다. 동네 길거리에서 만나 인사를 주고받는 아주아주 평범하기 그지없는 부자지간의 모습. 하지만 나의 심장은 쥐가 난 듯 조여들며 고통을 울부짖었다.
평소 가족끼리만 있을 때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이 타인의 시선 아래 놓이는 순간 솟아올랐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나의 회피를 눈치채고 먼저 반응하지 않았음이 느껴졌다. 정말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피로 맺어진 우리는 모든 걸 느꼈다.
IMF라는 거대한 파도로부터 나에게 물 한 방울 튀지 않도록 방파제가 돼 준 아버지인데, 내게 하이라이스라는 신문물을 맛보여 준 아버지인데... 정말이지 검은 머리 짐승의 간사함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역겹기 그지없다.
그날 나의 심장에 맺힌 피멍은 아직도 빠지지 않아 조금만 쥐어짜도 눈물을 쏟아내게 만든다. 그러나 누굴 탓하랴. 스스로 만든 상처임에. 그러나 아버지는 어떠한가? 죄라면 못난 아들을 낳고 정성스레 기른 죄밖에 없는 우리 아버지. 그날 내가 아버지의 가슴에 새긴 상처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상상만으로도 겁이 난다. 아마 내게 새겨진 상처보다 몇 배는 크고 깊을 것이며, 내가 그러하듯 아직도 아버지의 가슴 한편에서 쓰라린 통증을 유발하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아버지는 지방을 돌며 일을 다니셨고 이전보다 아버지를 보는 건 더욱 힘들어졌다. 그리고 당연히 아버지의 하이라이스도 먹지 못하게 됐다. 난 아버지의 하이라이스를 제외하곤 다른 하이라이스를 먹어본 적이 없다. 내게 하이라이스는 오직 아버지만의 음식이다.
하이라이스는 그 색깔만큼이나 내게 검은 상처를 남긴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