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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Oct 24. 2024

홍차

차이! 차이!

때는 20대 막바지. 튀르키예 여행 중 ‘리키안 웨이’라는 약 500km에 달하는 트레킹 코스를 걸었다. 20대의 남은 체력을 탕진하고자 한 것일까? 지금이라면 한사코 거절할 이 무식한 여행 일정을 20대의 패기와 무지로 실행케 되었다. 딱히 리키안 웨이를 계획하고 튀르키예에 간 것도 아니었다. 사실 튀르키예는 카파도키아를 보고 싶어서 간 곳이었다. 하지만 첫날 도착한 이스탄불의 숙소 직원이 소개해 준 리키안 웨이라는 곳에 꽂혀 충동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커다란 배낭을 둘러메고 마을을 지나칠 때면 어김없이 “차이! 차이!(çay)”하는 소리와 함께 이리 오라는 손짓을 받게 된다. 그냥 심심 삼아 찔러보는 게 아닌, 바닷가 조개구이집 아주머니들의 호객행위처럼 열성적인 손짓에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초대. 초대에 응해 인사를 하고 튀르키예의 어른들이 둘러있는 테이블에 앉으면 어김없이 홍차를 따라준다. 처음엔 어색하고 민망하니, 튀르키예어도 못하는 데다가 처음 보는 사이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그들의 초대에 자연스레 손을 흔들며 다가가 가방을 내리고 각설탕 두 개를 홍차에 섞고 있는 나였다.


리키안 웨이를 걸으며 지나친 마을의 가정집 대부분은 울타리가 없는 단독주택 형태로 1층엔 기둥이 세워져 있는 빈 공간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곳 집 그늘에서 사람들은 모여 앉아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족, 친구, 이웃들과 차를 마시다가 내가 시야에 들어오면 열성적인 호객행위(?)를 했던 것. 앞서 말했듯 길 초반부에 이런 초대를 받았을 땐 겸양을 보이며 거절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반복되고도 끈질긴 손짓에 한두 번 자리를 하니, ‘어라? 이거 너무 좋은걸?’ 싶은 게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사실 내게는 꼭 필요한 자리였다.     


산길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오히려 쉴 만한 곳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산에서야 아무 바위, 혹은 길에 주저앉아 쉬면 되지만, 마을엔 딱히 앉아 쉴 만한 벤치나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았으며, 산처럼 길바닥 한 가운데 앉기에는 모양새가 좀 그랬다(자신의 동네 길바닥에 누군가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라. 최소 10m쯤은 떨어져 둘러 가고 싶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번듯한 의자에 그늘까지 드리운 공간은 그야말로 휴식을 위한 훌륭한 공간! 게다가 강한 햇볕 아래서 수 킬로미터를 걸어와 온몸에서 당이 떨어졌음을 부르짖을 때 제공하는 홍차. 비록 아이스 홍차가 아닌 게 아쉽지만은 이열치열의 심정으로 뜨끈한 홍차에 각설탕 두 개, 정말 죽겠다 싶은 날엔 세 개까지 집어넣고 달달달 녹여 한 모금 하면 흐리멍덩하게 풀렸던 동공에 다시금 생기가 반짝하고 돌았다. 게다가 갖가지 한 입 거리 과일까지 내어주니, 이건 뭐 카페였다면 최소 만 원 이상의 서비스를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티타임은 휴식과 에너지 보충, 긴장 완화까지 육체와 정신 모두를 충전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주민들과의 티타임이 내게 엄청난 득이 됨을 알지만 바로 대화에 대한 부담이 큰 걸림돌로 작용했는데 나중에는 이마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단 이들은 내게 딱히 뭘 듣고자 부르는 게 아니었다(지극히 나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나에게 극동아시아 지역의 정세나 투자가치가 높은 기업 등을 물어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본인들이 말하기 위해 나를 앉혀놓는 느낌이었다. 작은 마을에서 매번 똑같은 사람들끼리 하는 티타임에 신선한 자극제 같은 존재랄까나?      


내가 하는 말이라곤 “꼬레~ 꼬레~ 나 한국 사람이에요~”, “리키안 웨이~” 그리고 다음에 갈 마을 이름 정도를 말하면 여차저차 대화가 술술 이어져 나간다. 그렇게 적당히 미소 지으며 아는 단어가 나왔을 때 한 번씩 끼어들며 홍차를 마시고 과일을 까먹으면 된다. 그렇게 잠시 앉아있다 보면 거짓말처럼 대화의 흐름이 이해되고 진짜 주민과 편한 수다를 떠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처럼 호기심도 많고 인정도 많은 튀르키예의 어른들.      


각설탕을 녹인 따뜻한 홍차는 튀르키예의 정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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