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6개월여의 배낭여행 중 총 세 곳의 트레킹 코스를 걸었고, 이 글은 그중 첫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다.
자그마치 10년이나 지나서 이 글을 쓰게 된 건 여행 중 하루도 빼먹지 않고 썼던 일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문득 눈에 띈 그날의 일기. 책장에 꽂혀있던 일기를 꺼내 한 장 한 장 읽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기록된 일기장을 따라가니 마치 여행을 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리웠다. 그날의 풍경, 음식, 사람 그리고 그 시절의 내가 말이다. 한번 튀어나온 그 시절의 향수의 여운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이렇게 책으로까지 써보자는 마음까지 갖게 되었다.
지속적으로 세계여행을 같이 가자며 조르던 친구의 말이다. ‘세·계·여·행.’ 남녀노소 만인의 버킷리스트 필수 항목이자 낭만실현의 최고봉. 단연 거부하기 힘든, 매혹적인 단어. 하지만 그 당시 난 이제 막 취업에 성공한, 열정 넘치는 뽀시래기 상태에다가 나름 일이 적성에도 맞아 친구의 제안에 선뜻 응할 수 없었다.
그렇게 친구와 매주 만나 술을 마시며 여행에 대한 로망과 따박따박 꽂히는 월급의 현실을 저울질할 때, 고모부께서 돌아가셨다. 평소 건강하시고 꽤나 부유한 삶을 보내시던 고모부는 급성백혈병으로 인해 투병 생활 불과 몇 개월 만에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 ‘인생이란 참으로 성급하구나.’ 고모부의 죽음으로 인생은 내가 미룬 일을 기다려줄 정도로 인내심이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고모부의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떠나자’고 결심했다.
친구는 나의 결정에 반색하며 당장에라도 떠날 것처럼 방방 뛰었다. 하지만 낭만은 현실의 잔인한 무게 앞에서 한없이 가벼울 수 있음을. 결국 친구는 막판까지 현실의 무게를 덜어내지 못했고, 나 홀로 여행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난 첫 목적지를 친구가 가고 싶어 하던 ‘산티아고 순례길’로 정했다.
여행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을뿐더러 저렴한 비용으로 유럽에 체류할 수 있다는, 낭만 찾아 떠나는 여행이지만 여전히 현실적 제약에 사로잡힌 발상에 의한 결정이었다. 그렇게 큰 기대도 낭만도 없이 시작한 걸음이지만, 발을 내딛는 순간 길로부터 엄청난 에너지가 빨아올려졌다. 걸음마다 지면으로부터 쭉쭉 올라오는 기운과 쌓여가는 추억으로 인해 길을 걷는 한 달여의 시간은 알차게 채워졌다.
순례와 여행, 순례자와 주민들, 문명과 자연, 고난과 행복, 만남과 헤어짐, 동행과 고독, 이 모두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곧게 뻗은 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한 가엽고도 행복한 순례자의 이야기. 그날을 기억하며 이 글을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