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정말이지 사람이 어떤 일에 한 번 크게 데이면 정확한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된단 걸 깨달았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푸엔테라레이나(Puente La Reina)’와 ‘에스테야(Estella)’ 사이의 어느 한 작은 마을에 들어섰을 때였다. 난 여느 때와 같이 작고 조용한 마을의 정취를 느끼며 한가로이 걷고 있었다. 그런데 일순간 한 무리의 아이들이 소리치며 내게 뛰어왔다. 난 반사적으로 아이들을 뿌리치며 황급히 걸음을 옮겨 멀리 도망쳤다. 잔뜩 경계하는 눈빛과 함께 내 심장은 이리떼를 만난 듯 두려움과 놀람으로 방망이질 쳤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안전거리를 확보하자 놀란 가슴은 점차 진정됐고, 현 상황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할 여유가 생겼다.
나를 덮친(?) 아이들은 기껏해야 5~7살 정도 돼 보이는, 정말 작디작은 아이들이었다. 떼로 덤벼들어도 팔랑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한 타격밖에 없을 얇은 팔다리를 지닌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내게 몰려올 때를 회상하니(고작 몇 초 전의 일이었지만) 아이들의 얼굴은 한껏 들뜨고 신난 표정이었다. 그리고 내가 놀라 도망가자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말며 어리둥절하고 풀 죽은 표정을 짓던 한 소녀가 눈에 박혔다. ‘내가 뭘 잘못했나?’하는 듯한 그 아이의 표정에 큰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스스로에게 “야이, 쓰레기 같은 놈아! 어떻게 저 귀엽고 어린아이를 보고 도망을 칠 수 있냐! 나가 죽어! 나가 죽 어라~”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변명의 기회를 준다면 난 그저 트라우마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가엾은 피해자(?)였단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사건 발생 불과 약 일주일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기 위해 파리로 입국한 나는 악명 높은 집시 아이들의 공격을 받았다. 소매치기하려 슬쩍 접근한 거 가지고 요란 떤다 할 수 있지만 그건 분명 공격이라 부를만한 것이었다!
이국에서의 낭만을 즐기던 내게 느닷없이 달려든 한 무리의 아이들. 난 그저 어리둥절하니 사위가 포위된 채 멀뚱히 서 있었다. 아이들이 나를 포위하고는 정신없이 뭐라뭐라 떠들기에 뭐라고 하는지 집중함과 동시에 혼이 살짝 나갔는데, 순간 내 주머니로 들어오는 손이 느껴졌다. 옷에 붙어 있는 모든 주머니와 가방에까지 손을 대는 아이들에 정신이 바짝 들며 황급히 손을 쳐내며 도망쳤다. 정말이지 강물에 빠진 고깃덩어리를 향해 덤벼드는 피라냐 떼가 연상될 만큼 피 튀기고, 잔인하고, 박진감 넘치는… 그래… 사실 어떻게 포장하려 시도해도 실상은 그냥 조그만 아이들에게 겁먹고 도망간 쫄보 성인 남자의 모습이었다.
하여튼 그날의 공격이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는지 달려드는 아이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도망을 친 것이다. 정말이지 다시 반복하지만 파리의 집시 아이들은 무서웠다! 진정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아이들의 놀이터 겸 광장 역할을 하는 듯한 공터 한 곳에 가리비를 비롯해 순례자를 위한 몇몇 물건들이 바닥이며 벤치 위에 깔려 있었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경계심에 멀찍이서 훔쳐보니 직접 만든 듯한 소품들이 꽤나 귀엽고 탐나게 생겼다. 하지만 이미 멀리까지 도망 온 탓에 다시 돌아가자니 뻘쭘하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그곳엔 또 다른 아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분위기가 좀 달랐다. 번듯한 테이블에 이런저런 소품들을 진열해 놓은 상태였다. 아까의 아이들보다는 좀 더 큰 아이들이었는데 그래봤자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 되려나? 제법 장사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광장의 아이들처럼 덤벼들지도 않고 자신의 좌판 앞을 지키고 서서 가장 큰 무기인 귀여운 눈동자와 미소로 나를 맞아 주었다. 아이의 차분한 모습에 덩달아 나도 침착해지며 좌판에 깔린 소품들을 구경했다. 그중 무지개색 가리비가 눈에 띄었고, 얼마냐 묻자 아이는 입술을 쭉 내밀며 “Tow~”라고 하는데 어찌나 귀엽던지(역시 딸이 최고야)! 이전 아이들에 대한 속죄도 할 겸, 배낭에 홀로 달려 있는 가리비에게 친구 도 만들어 줄 겸해서 무지개색 가리비를 샀다. 걸음마다 달그락 거리는 두 개 의 가리비 부딪히는 소리가 얘기를 건네는듯해 걸음에 힘을 보탰다. 그리고 앞으로 어린아이들에게 겁먹지 말라고 속삭이는 가리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