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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Mar 07. 2023

10. 든든한 지팡이


평소보다 일찍 알베르게를 나섰던 탓일까? 유난히 앞뒤로 마주치는 이 없이 오로지 태양과 나만이 길을 걷는 듯한 날이었다. 원래 걸으며 사람들과 적당히 수다도 떨어주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힘든 것도 덜한데, 유독 휑한 인적에 체력마저 쭉쭉 달았다. 의지할 건 두 손에 쥔 스틱뿐인 상황에서 술 생각이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치밀었다. 그래. 외로울 땐 자고로 술이 최고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이라체(Irache)’ 에서 와인 한 잔, ‘아스케타(Azqueta)’에서 맥주 또 한 잔. 그렇게 술로 지치고 힘든 몸과 마음을 달래보고자 했지만 술기운에 피로가 회복되는 건 잠시, 오히려 스페인 태양의 화끈함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렇게 술기운을 머금은 길과의 외로운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키 작은 노부부가 눈에 띄었다. 큼직한 등짐에 헐렁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서로 꽉 맞잡은 두 손이었다. 둘은 서로의 지팡이가 되어주며 길을 걷고 있었다. “오옹…” 나보다 한참 어르신에게 이런 표현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다만,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나도 모르게 진실의 미간과 함께 감탄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두 어르신의 아름다운 동행을 꽤 오래 쫓아가는 동안에도 둘의 손은 떨어질 줄 몰랐고, 그런 모습에 저 깊은 단전으로부터 부러움이 치솟았다.  


양손에 쥔 거라곤 고작 스틱뿐인 내가 새삼 안쓰럽게 느껴졌다. ‘내가 의지 할 거라곤 고작 작대기 두 개뿐이구나… 크흑…’ 산티아고를 걸으며 인생목표 하나가 추가됐다. 나도 저렇게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두 손 꼭 잡고 지낼 인연을 만나는 것! 흔히 인생은 길에 비유되곤 한다. 그저 문학적 클리셰로 치부했던 이 표현 이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길고도 긴(정말로 오지게도 긴) 길을 걷다 보면 얼마나 찰떡같은 비유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오르막 내리막, 만남과 헤어짐, 변하는 풍경과 지형, 예고 없이 찾아오는 사건 사고, 내가 짊어지고 갈 짐의 무게, 그리고 수백 수천 번 맞닥뜨리는 갈림길에서의 선택까지. 오늘 노부부의 동행을 보며 다짐했다. 무엇을 쥐게 될지 선택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그 어떤 순간에도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1순위로 택할 거라고. 사랑하는 이의 따스한 손만 쥐고 있다면 그 어떤 험한 길도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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