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드리우듯 대지에 넓게 깔린 안개와 아직 산을 넘지 못해 은은하고 포근한 태양빛이 낭만스런 아침. 안개에 스며든 노란 아침햇살을 몸에 적시며 길을 걷는데 한 여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나무에 앉아 지지배배 우는 새를 바라보던 그녀를 지나치며 “새가 뭐라 하는 거야?”하며 넉살스레 물었다. 그러자 “오늘도 잘 걸으래!”라며 나의 농담 어린 질문에 환한 미소와 함께 동심 어린 대답으로 화답한다. 그녀의 순수함에 정화된 기분을 간직한 채 길을 나아가는데 얼마 안 가 이번엔 한 잘생긴 청년이 산을 넘어오는 해를 그윽하게 쳐다보고 있다.
이제 막 산의 끄트머리를 잡고 기어오르는 햇살은 문틈으로 흘러들어오는 바람처럼 날카롭게 눈부셨다. 언덕의 무대 위에서 자욱하게 깔린 안개와 반짝이는 아침햇살의 자연 특수 효과를 받으며 서 있는 청년. 이 모습 그대로 영화의 엔딩씬으로 가져다 써도 손색없을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물론 무대의 방점을 찍는 건 역시나 그의 훤 칠한 키와 외모였지만… 이런 아름다운 무드를 망치기 싫어 조용히 눈인사만 하고 지나가려는데 내 게 사진을 부탁하는 청년. 사진을 찍기 위해 그의 카메라를 건네받고 프레임에 담긴 화면을 바라봤다. 청년 뒤로 솟아오르는 태양과 양옆의 반짝이는 밀밭, 그리고 서서히 승천하는 안개. 저절로 “캬하~ 그림 좋다! 그림 좋아!”하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내게도 사진을 찍겠냐는 청년의 물음에 괜스레 지금의 무드가 깨질까 거절했다.
등 뒤로 떠오르는 햇살을 바람삼아 서쪽으로 항해하는 순례자들. 따스했던 아침 기운에 정말 신을 향해 가는 듯한 성스러움이 차올랐을 때, 한 무리의 스페인 사람들을 만났다. 오늘 계획한 일정은 길지도 않고 딱히 구경거리도 없는 길이었다. 그래서 기존 루트를 좀 벗어난 곳에 표시된 성당을 구경하기로 했고 그 길에서 만난 스페인 무리. 그들은 아침에 만난 이들과는 정반대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파란 단체복을 맞춰 입은 그들은 깃발까지 흔들며 파이팅 넘치는 걸음과 목소리를 내며 길을 휩쓸 듯 지나갔다.
정식 루트를 벗어난 길이기에 노란 화살표도, 사람도 없는 길을 걸으며 아침의 낮게 깔린 안개와 같은 느긋함을 향유하던 내게 그들은 강한 돌풍으로 다가왔다. 급변한 분위기에 살짝 정신이 혼미했지만 하나하나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열댓 명 정도의 사람들이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니 죽어 있던 길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그들 역시 내가 가려는 성당에 가는 중이었다. 기도를 드리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둘러 간다는 그들에게 새 땅을 찾아 나서는 개척자와 같은 당당함과 패기가 느껴졌다.
그런 그들을 보고 있자니 아침과는 다른 또 다른 무드의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성스러움이라하면 응당 차분하고, 조용하고, 품위 있고, 격식 있게, 체면과 체통을 유지한 모습을 떠올리지만, 생각해보면 저들처럼 기쁨에 날뛰는(?) 모습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존재를 찾아가는 길에 더 알맞은 모습처럼 보였다. 고요함과 발랄함. 이 모두가 순례자들이며, 이 길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