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대는 스페인의 태양도, 쉬지 않고 내딛는 내 다리도, 급히 내달리는 도로의 차들도, 쪼르르 쪼르르 쉴 새 없이 밀밭 사이를 날아다니는 새들도, 내 10m의 장보다 활발한 건 없었다. 난 어제 마트 점원의 제스처를 간과하지 말았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으로 마실 우유를 골라 계산하러 갔을 때 점원은 내가 건넨 우유를 집어 들고 “진짜 이거 살 거야?”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우유의 크기 때문인가? 우유를 좋아하는(물론 잘 먹기도) 나는 “괜찮다”며 점원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점원은 선뜻 계산하지 않으며 우유를 잡지 않은 손으로 가슴부터 아랫배까지 쓱~ 쓱~ 쓸어내리며 시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어휘력이 부족해 자세한 표정 묘사는 힘들지만 아마 시원한 표정이 뭔지는 다들 예상될 거라 생각한다). 난 점원의 보디랭귀지를 찰떡같이 알아들었다(누가 봐도 그 표정이었기에). 하지만 ‘원래 우유가 장운동에 좋지’하는, 으레 우유에 대한 통상적 말이겠거니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자고로 아침은 든든히!’란 사고가 박혀 있을 때였던지라 어제 산 빵과 우유 한 통을 먹고 든든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그리고… 길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첫 신호가 왔다. 그때만 해도 ‘아, 우유를 좀 많이 먹긴 했나?’ 싶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낙관적 사고였다. 잠시 뒤 약진 이후 몰려오는 강진과 쓰나미처럼 내 뱃속은 격렬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항문으로 돌진하는 쓰나미를 막기 위해 내 문지기들은 필사의 악력으로 문을 붙잡고 버텼다. 온 정신과 근육이 그곳을 조이는데 총력을 다했으며, 그 힘에 내 몸 전체가 그곳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알베르게를, 정확히는 화장실을 향한 마지막 5km. 전신의 모든 땀구멍이 완전 개방돼 식은땀이 온몸을 덮었고,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하게 깨어나는 감각과 집중력에 성불의 경지에 이를 것만 같았다. 다행히 나는 필사적으로 성문을 사수함으로써 사회생활을 위한 인간존엄을 지킬 수 있었다. 정말 고생했다 나의 그곳아… 하지만 언제나 고통은 엎치고 덮치는, 우는 아이를 업은 성난 어미처럼 쌍으로 오는 법. 겨우 도착한 알베르게의 주방은 도저히 음식을 할만한 상태가 아니었으며, 주위에 마땅한 음식점마저 없었다. 속은 깨끗하게 비워 놨는데 채울 게 없다니. 이게 무소윤가 뭔가 하는 경지인 것인가… 공허한 단전으로부터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늘 걸은 25km의 길보다 10m 장에서 더 많은 것을 깨닫는 하루였다. (ps. 트레킹 중에는 Fibra(섬유질)라 쓰인 우유는 피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