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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Mar 27. 2023

17. 베드버그


뜨거운 태양, 끝없는 오르막길, 맛없는 식당 등 길에서 피하고자 하는 건 많지만 그 중 넘버원은 역시나 베드버그가 아닐까 한다. 베드버그는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어느 순간 극심한 가려움에 무의식적으로 몸을 벅벅 긁다가 문득 붉은 반점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면 “아…… X 됐다……”하는 체념 어린 탄식과 함께 베드버그에 당했음을 깨닫는다. 


일단 베드버그가 최악인 이유 중 하나는 단연 가려움증에 있다. 그 정도가 어떠한가 하면 동행하던 동생은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신음과 함께 이층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동생이 있던 침대 1층에서 자고 있던 난 ‘이게 무슨 상황이지?’하며, 잠에서 덜 깨 둔해진 사고회로를 돌려보려 애썼다. 그리고 곧 종아리를 벅벅 긁으며 화장실로 향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 베드버그에 물렸단 걸 알 수 있었다. 화장실로 향하는 동생의 뒷모습은 실로 애처로웠다. 


황당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했던 동생의 침대 탈주 사건. 다음날 동생의 다리는 붉은 반점과 손톱자국이 뒤엉켜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베드버그의 무서움 중 또 하나는 낙인효과다. 베드버그의 이동 경로를 따라 점점이 찍히는 붉은 반점은 마치 주홍글씨와 같다. 일렬로 늘어선 붉은 반점은 베드버그 보유자(?)임을 증명하는 자국으로써 주위 사람들로부터 공포의 대상이 된다. 언제든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붉은 반점이 발견되면 즉시 베드버그를 제거하기 위해 배낭을 비롯해 안의 모든 옷가지며 침낭, 신발, 그야말로 내 몸과 소유물 전체를 세척해야만 하는 번거로움을 겪게 된다. 심지어 집까지 베드버그를 달고 돌아가는 가능성도 있기에 반드시 완전 박멸에 만전에 기해야 한다. 


나 역시 길 말미에 베드버그의 습격을 받았다. 마을 벤치에 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어 발에게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고 있던 때였다. 그때 옆에 있던 동생이 “발에 뭐 물렸네요?”라는 게 아닌가? 그 말에 “그러네?”라며 별생각 없이 바지를 걷었는데 다리에 조개껍데기마냥 붙어 있는 붉은 점들! 순간 올 것이 왔음을 깨닫고 절망했다. 종아리부터 등허리까지 길게 찍힌 낙인. 이후 시한부의 심정으로 다가올 가려움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이게 왜 이러지?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들의 미치고 팔짝 뛰는 모습은 정녕 엄살이었단 말인가? 혹시나 베드버그가 아닐 수도 있는 가능성을 두고 붉은 반점을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주었지만 모두 단호하게 베드버그 판정을 내렸다. 길 말미쯤 되면 다들 베드버그 판별에 있어 프로급의 실력자가 되어 있었기에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여태껏 순례길에서 마주하는 최악의 위험 중 단연 최고네, 침대에서 뛰어 내릴 만큼 참기 힘드네 하며, 잔뜩 베드버그에 대한 무서움을 나열해놓고 “이제 와서 이런다고?” 할 수 있지만 거짓을 고할 순 없으니……. 나도 좀 뻘쭘하긴 하다. 아마도 추측건대 어릴 때 아토피를 비롯한 피부병에 시달렸던 게 간지럼에 대한 내성을 키웠고, 이로 인해 베드버그마저 무감각하게 넘긴 게 아닐까 한다(뭐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하여튼 운 좋게 가려움 지옥에 빠지진 않았지만 짐 전체를 세탁하는 번거로움과 반바지를 입으면 보이는 베드버그 자국에 나의 용모를 훼손하며, 남들에게 베드버그 보유자란 낙인이 찍히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사실 이처럼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베드버그도 순례자들에겐 장난의 대상이자 귀여운 투정거리 중 하나일 뿐이긴 했다(이전에도 언급했듯 대부분의 순례자 들은 힘들 때도 웃을 줄 아는 일류들이니까).  


알베르게에서 빨래를 잔뜩 하는 이가 있으면 다가가서 베드버그에 걸렸냐고 묻는다. 그러면 붉은 자국을 훈장처럼 보여주며 빨래하느라 힘들어 죽겠다느니, 가려워 죽겠다느니 투정 어린 소리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런 이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다(순례자들에게 엄살은 기본 옵션과도 같다). 그런 이들에게 “아이고~ 고생한다. 그런데 좀 떨어져 주겠니?”라고 장난을 걸면 던지면 물린 부위를 내밀며 좀비마냥 쫓아온다. 그럴 때면 한바탕 크게 웃어 재끼며 도망을 갔다(설마 하면서도 진짜 베드버그가 옮을까 무섭기도 한 건 사실이었거든. 하하). 


낮에는 무사히 오늘의 길을 걷게 해줌을, 밤에는 베드버그의 습격으로부터의 무사취침을 바라는 순례자의 기도. 오늘도 걷고 있을 순례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부디 오늘밤도 무사히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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