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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스타 Mar 24. 2023

16. 친구


대략 한 달 정도 같은 길을 걷다 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인사하고 몇  마디 나누다가 친해지는 사람이 생긴다. 나 같은 경우는 안으로 굽는 팔과 언어 장벽의 한계로 인해 친해진 사람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다(아마 대부분 그러지 않을까 싶은).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은 정말 기초적인 영어 실력과 사회성만 있다면 손쉽게 외국인 친구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다. 나 역시 안면을 트고 소소하게 얘기를 주고받는 외국인 친구들이 몇 있었지만 짧은 영어 실력과 ‘사회성이 부족한 아이(절친피셜)’기에 깊게 친해지진 못했다. 


하지만 이런 내게도 나름(?) 꽤 친해졌다 할만한 외국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케이’다. 케이와 처음 말을 나눈 건 ‘시라우키(Cirauqui)’ 마을을 앞두고였다. 시라우키에 들어서기 전 언덕 위 우뚝 솟은 바위를 바라보고 있던 내게 누군가 옆을 지나 치며 서툰 한국말로 “안녕하세요”하는 게 아닌가? 모국어에 대한 자동반사로 돌아보니 그가 있었다. 


그, 케이는 우리 한국인 일행들 사이에서 화제의 남자였다. “과연 저 잘생긴 동양인 남자는 한국인일까?” 길 초반부를 함께했던 ‘쏘’누나를 비롯해 나를 아빠라 부르며 따르던 여동생 둘의 희망 섞인 의문. 한‧중‧일 판독기를 본 투 비(born to be) 내장형으로 장착한  우리에게도 케이의 국적 파악은 쉽지 않았다. 딱히 대화할 기회가 없었기에 모두의 궁금증만 커져 가던 때, 그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 온 것이었다. 난 우리 코리안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줘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며 그에게 말을 붙였다. 


당연히 첫 질문은 국적이었다. ‘한국, 중국, 일본, 아니면 제3의 아시아?’라 생각하고 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뜬금없는 프랑스였다. 베트남과 프랑스 혼혈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케이. 그의 대답에 ‘검은 머리= 아시아인’이란 고정관념의 울타리에 갇혀 있던 나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되었다. 케이는 주위에 한국인 친구들이 있어서 몇 가지 한국어를 할 줄 안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왠지 나를 잘 이해해 줄 것만 같은 느낌과 친숙한 외모(검은 머리)에 정감 가는 친구였다. 


케이가 한국인이 아니라는 소식에 우리 일행들은 적잖이 실망했는데, 이후에 길이나 알베르게에서 만날 때면 같이 시간을 보내며 꽤나 친해졌다. 케이는 내가 ‘산 페르민 축제’에 가면서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길 막바 지에 재회했을 때 순례길의 인기인이 돼 있었다. 동서양을 아우르는 잘생긴 외모와 서글서글한 성격, 유창한 영어까지. 인기가 없을래야 없을 수 없는 친구였다. 


남자 사람 친구에 케이가 있다면 여자 사람 친구로는 ‘리디아’를 꼽을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본고장 스페인 국적의 리디아는 길을 걷기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처음 만났다. 마트를 앞두고 ATM을 찾기 위해 헤매던 내게 무사히 돈을 찾아 주린 배를 채우게 도와준 리디아. 그렇게 시작된 연은 길이 끝날 때까지 길고 깊게 지속됐다. 다른 외국인 친구보다 리디아와 좀 더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리디아가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첫 만남 인사 후 공식처럼 하게 되는 “Where are you from?” 질문에 보통  “Korea!”라고 하면 더 이상 연고지에 대한 질의응답은 끝나는데(해봤자 North  or South 정도?) “한국 어디?”라며 예상치 못한 후속 질문이 들어왔다. 난 은연중에 말해도 모를 거라는 어투로 부산(그 당시에 살았던)이라 답했다. 그러자 “오~ 부산!”하며, 마치 파리나 런던과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명을 듣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의외의 반응에 ‘부산이 어느새 이렇게 유명해졌지?’하는 의구심이 가득 찬 어투로 부산을 아느냐 물었더니 끄덕거리는 리디아. 


알고 보니 한국인 남자친구와 무려 5년간 만났었다고. 그러면서 김치찌개, 불고기 등등 한국 음식을 줄줄이 나열하는데 어찌나 신기하던지. 백인인 리디아가 읊조리는 한국말은 마치 할리우드 배우가 “한쿡 싸랑해욥”하는 모습을 직관하는 생소함과 같았달까? 외국인과 긴 시간 대화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언어장벽으로 인한(대부분의 경우 나의 짧은 영어 실력 때문에) 피곤함과 소재 고갈로 인해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며 ‘이쯤에서 헤어져야 할 시간이군’하고 생각하게 되지만 리디아는 특유의 편안함으로 그런 불편을 느끼지 않게 했다. 


이후 길에서 만날 때마다 다음 마을까지 동행을 했고, 아예 약속을 하고 만나서 하루 여정을 통으로 함께하기도 했다. 리디아와 동행할 때면 원주민 프리미엄을 톡톡히 느끼곤 했는데, 때때로 정식 루트에서 벗어난 곳에 있는 성당이나 유적을 가기도 했으며, 스페인어로 하는 가이드의 설명을 통역해 주기도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을 꼽으라면 세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리디아. 그만큼 길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추억을 쌓았다. 


비록 시간이 흘러 그들의 존재가 많이 엷어졌지만, 이렇게 한 번씩 그 길을 추억할 때면 봄날의 꽃처럼 길 위의 사람들은 피어난다. 언젠가 다시 만나 환하게  웃으며 “부엔 까미노(Buen camino)!”라고 인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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