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자카르타
외국인 관광객이 먹여살리던 관광지 발리는 코로나가 터진 뒤로 내수 여행자들에 의존해 겨우 생존하고 있다. 코로나 여파로 관광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 발리에 나 같은 외국인들이 더러 보이는데, 이들은 십중팔구 인도네시아에 장기 거주하는 외국인이거나, 나처럼 일하며 거주 비자를 얻은 외국인들이다.
내가 발리로 떠났던 올해 4월만 해도 인도네시아에 코로나 확진자가 지금처럼 심각하진 않았다. 지금 자카르타에서 발리로 인도네시아 안에서 이동하려고 해도 백신 접종 증명서와 PCR 테스트 음성 결과지가 있어야 비행기를 탈 수 있지만, 저때만 해도 24~48시간 내 발급한 안티젠 테스트 결과만 있으면 됐다.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는 GeNose라고 비닐봉지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서 코로나 감염 여부를 검사하는 신박한 테스트까지 도입했는데, 검사 비용이 저렴하다고 해도 이건 아무래도 찝찝해서 도전하지 않았다.
2020년 1월의 발리와 2021년 4월의 발리는 영 딴판이었다. 외국인들로 북적거렸던 국제공항은 한산했고, 호객 행위를 하는 택시도 별로 없었다. 친구 소개로 알게 된 운전기사 N 아저씨는 공항에서 나의 목적지인 창구 (Canggu)까지 데려다 달라는 연락을 받고 아주 기뻐하셨다. N 아저씨는 "약 1년 만에 손님을 데리러 공항에 왔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와 함께 온 키 큰 청년이 있었는데, 마스크를 써도 인물이 훤했다. 내가 궁금해하자 아저씨는 "자카르타에서 경찰하고 있는 내 아들"이라며 자랑하셨다. 자카르타 경찰은 얼굴을 보고 뽑나 보다. 발리에 유명한 여행지가 많지만 이번에 창구에서만 오롯이 7박8일을 계획한 이유는 서핑 때문이다. 2016년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서핑에 처음 입문했고, 한국 양양과 부산 송정, 스페인 카디즈, 영국 콘월, 발리까지... 어쩌다 가본 도시들이 우연찮게 서핑으로 유명해서 나도 서핑을 해본 것뿐이다. 누가 들으면 서핑 고수인 줄 알겠지만, 나는 보드에 겨우 서서 중심 잡고 파도 타는 초짜 중 초짜다. 맨날 초급반만 반복해서 듣다 보니 보드에 남들보다 조금 빨리 서는 초급반 모범생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서핑을 좋아하긴 하지만 어디 가서 서핑 배웠다 말하기도 민망했다. 발리가 다시 외국인 관광객에게 국경을 열기 전, 조용할 때 창구로 가 일주일 내내 서핑을 배우는 것이 이번 여행을 목적이었다.
하지만 발리는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코로나로 관광객이 줄어서 바가지를 더 씌운다는 이야기는 거짓이었다. 여기저기 ‘코로나 세일’ ‘코로나 특가’라는 광고가 붙어있었고, 내가 7박8일 동안 지낸 숙소도 말도 안되는 가격에 예약했다. 발리에서 가장 잘 알려진 꾸타 해변에도 관광객이 고갈될 정도니 말 다 했지. 차가 밀려서 꿈쩍도 하지 않던 '발리의 강남' 스미냑도 한산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50분에 돌파하다니, 참 빨리 왔다고 생각하고 있는 찰나에 N 아저씨는 "코로나 전에는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라고 했다. 3개월, 6개월, 1년 넘게 이어지는 코로나 사태 때문에 관광객에 의존했던 발리 경제가 무너지고 있다면서 N 아저씨는 문 닫은 식당들을 보여줬다. 발리는 나 같은 내수 여행객들로 근근이 버티는 중이었다. 지난 1년간 힘들게 버텨온 아저씨와 발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자니 마음이 아파서 팁을 안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열심히 돈을 쓰자. 이렇게 해야 발리 경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구나. 큰돈은 아니지만 원래 계약했던 운전 비용보다 한국 돈으로 몇 천 원을 더 드리자 N 아저씨는 진심으로 감사해하셨다. 그렇게 발리 서핑 여행의 첫날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