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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리영 Jun 12. 2017

신문사를 떠나며

<철없는 30대의 유학병>

2차 술자리의 단상.

7년 1개월. 신문사 근속 연수다. 우리 신문사와의 인연은 대학교 2학년때 시작됐다. 전공 수업이었던 신문편집 실습 수업 일정에 XX신문 현장 방문이 있었다. 교수님은 담배 냄새 그득한 편집국으로 우리를 인도했고, 열심히 컴퓨터를 보며 일하던 기자님들의 모습을 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데, 왜 그렇게 멋있어 보였던건지. 그리고 그 오후 시간에 편집국에 있는 사람들은 편집기자인데, 엉뚱하게 나는 취재 기자의 꿈을 키웠고, 몇 개월간의 백수 생활을 거쳐 이 신문사에 입사했다.


6월 7일 사표를 쓰러 본사를 찾아갔다. 회사 1층 매점을 지나는 기분이 묘했다. 사회부 시절 당직 서러 들어와서 김치볶음밥을 종종 시켜 먹었던 곳이었다. 엘베 앞에서 회사 앞 구두방 아저씨와 우연히 마주쳤다. 7년간 내 신발을 고쳐준 고마운 분이었다.


"아이고, 오랜만이네.어데 있었노?" 아저씨가 말했다.

"아저씨 저 서울에 있었잖아요. 근데 저 이제 회사 그만둬요."

"와, 더 좋은데 가나??"

"아니요. 그냥 더 멀리 가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퇴사가 실감 났다.

편집국은 3층이다. 퇴사 인사에도 의전 서열이 있다. 가장 먼저 내가 소속된 편집국 보스인 국장실에 찾아갔다. 국장님이 음료수를 건네며 물었다.


국장  "황 기자가 몇기지?" (신문사 입사 기수를 묻는 뜻)

나  "47기입니다."

국장 "동기가 누구지?"

나 "노XX 기자요."

국장 "아이고. 이제 47기가 결기가 됐구만.."  


그리고 한동안 국장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고, 7년간 고용해준 회사에 대한 감사, 아쉬움, 섭섭함을 표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나 "국장님, 제가 사표를 한 번도 안 써봐서요..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라서 안 써왔어요."

(잠깐의 침묵)

국장 "나도 안 써봐서 모르는데..."


하긴, 신문사 입사 뒤 지금까지 남아있는 국장님도 사표 양식을 알리가 없었다. 드라마 속에 보면 가슴팍에서 '사직서'라고 적힌 흰봉투를 꺼내던데, 그룹웨어에서 사직서 양식을 찾다가 실패한 조직원은 그런 세레모니를 할 수가 없었다.


국장님과 나는 사표를 쓰기 위해 함께 경영지원국으로 갔다. 국장님은 "황 기자가 그룹웨어에서 사직서 양식을 못 찾겠다고 하더라"며 사표를 어떻게 써야하는지 꼼꼼하게 여쭤보셨다. 경영지원국장님은 "사표는 권할 만한 일이 아니어서 양식이 따로 없다"면서 종이와 사인펜을 가져오셨다. 그리고 나는 국장님이 불러주는대로 사직서를 썼다.


성명 : 황수영.

일신 상의 이유로 XX일자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사인.

 

악필로 휘갈긴 사표는 편집국장이 가져갔다.

환상 속 퇴사와 현실의 간극은 컸다. A4 용지에 사인펜으로 쓴 사표라니ㅠㅠ 띄어쓰기도 제대로 못한 엉망진창 사표를 쓰고 직장 생활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맛있게 먹으면 살 안찐다는, 0칼로리라는 그 양고기!!!!! 떠나는 후배에게 선배가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 양고기였다.

  

신문사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많은 격려를 받았다.


"내가 니 나이였더라도 갔을꺼야"

"건강 잘 챙겨"

"이왕하는 공부 박사까지 하고 와"

"가서 돈많은 중동 석유 재벌 만나"

"아프면 안된다"

"잘할꺼야"

"영국 생활비 비쌀텐데, 알바비 줄테니까 신문에 글 좀 써ㅋㅋ"


떠나는 사람 등 뒤에 돌 던질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은 식구들의 격려는 큰 힘이 됐다.


그리고 그날 저녁, 친한 선배들을 만났다. 한 선배는 "회사는 2차 사회"라며 계약 관계가 끝나면 뒤 돌아보지 말고 쿨하게 떠나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후배를 놓아줘야 하는 우리 선배님은 쿨하지 못했다. 떠나는 후배를 양고기집에 데려가 배불리 먹여주셨고, 남편님께 애를 맡기고 나온 다른 회사 선배까지 합세해 2차를 책임졌다. 저녁 6시 30분에 시작된 술자리는 그렇게 밤 11시가 지나서야 파했다.


"애를 낳는다고 해서 행복의 총량이 늘어나는게 아니라 원래 행복의 종류가 ABC 밖에 없었다면 DE까지 늘어나더라. 다들 결혼하고 애낳고 산다고 조급해 하지마. 니 속도대로 살면 돼."

"내 동거인(와이프)한테 수영이 영국간다고 하니까 '잘됐네!!'이라더라. 니는 함안 촌년이지만 세상을 보는 틀이 넓다. 거기 살아보고 좋으면 아예 돌아오지 마라. 그리고 나중에 내 초대해라ㅋㅋ"


거나하게 취한 선배는 나중에 영국에 초대받을 상상 때문에 신이 났는지 헤어질 때 나를 너무 세게 안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7년간 일했던 회사를 떠나는 6월 7일, 하루종일 사람들과 이별했는데 이상하게도 눈물 한방울 나지 않았다. 눈치 없는 눈물은 하루 늦게 터졌다. 아침에 머리를 감다가 고개를 숙인채 펑펑 울어 버렸다. 눈물이 참 타이밍을 모른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월급을 받을 수 있어서 순간 순간 행복했다. 가끔씩이었지만 내 글 때문에 세상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보았고, 보람도 느꼈다. 물론 2년 주기로 다 때려치우고 회사를 뛰쳐나가고 싶다는 스트레스가 찾아왔으나 마지막이 되니 사회인 황수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품어준 회사가 고마웠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다가 피식 웃었다.

 

신문사를 돌며 인사를 하고 있는데 경영지원국 차장님이 큰소리로 불렀다.


"황수영씨!!!"

"네??"

"노트북 반납해야지..???"

"아.. 저 담주까진 기사 써야 하는데ㅠㅠㅠ 택배로 보낼게요..."


퇴사는 현실이다. 낭만은 없었다.   





건강 상의 이유로 일주일간 노알콜 라이프를 살아야 했던 나는 선배들이 나빼고 맛있는 중국 술을 먹다가 욱해서 "이제 그만 마시세요!!"하고 이 술을 가방에 넣어 챙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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