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닉룸 1
"언니, 멋있는 거 같아!"
하! 분명 그럴 상황이 아닌데, 나는 지금 그 말이 떠오른다.
병원에 가서 공황약 처방받고,
불안한 상태를 진정하려 맥주캔을 홀짝이는 지금.
정신이 온전하고 싶은 마음에 지금 혼미함을 선택한 상황에 떠오른 기억.
사람들과의 경험과 바람은 또 이렇게 상충하고 번뇌를 일으킨다.
우산 꼭지를 아스팔트 바닥에 꽂듯 짚고 두발을 공중으로 들었다 땅에 닿는다. 별 의미 없이 하는 행동에 재미를 느낀 소녀의 입꼬리가 살짝이 들린다. 옛 유럽의 그림에 나올 법한 발그레한 옅은 분홍빛이 어린 얼굴에 곱슬곱슬 나풀거리는 긴 머리칼, 아기자기한 프린트가 있는 연분홍의 원피스를 입었다. 누가 볼까 혼자만의 기분을 간직하며 새침하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어여쁘다.
취하기 위해 술을 사러 가는 나는 조급함에 들어온 아이의 천진난만함이 나를 초라하게 한다. 다행히 나에게 눈을 두지 않고 지나가는 소녀였지만 혹시나 들킬까 고개를 슬쩍 돌린다. 상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는 것이 괴롭다.
세상은 참으로 배려가 없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에 인색하다. 병원에 가서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이렇게 나를 표류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병원은 증상의 완화와 치료를 하는 곳이지 고민상담소가 아님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정신의학과도 병원이었다. 그 깨달음이 배신으로 다가왔다. 울적하고 안전지대 하나가 사라졌음에 혼미하다.
조심히 조금 뱉어냈음에 날아갈 듯한 정신을 부여잡겠다고 엉뚱하게도 취기를 찾는다. 그리고 익숙한 행동의 하얀 머리칼을 흐린 눈으로 또렷이 봐버렸다. 내를 지금에 이르게 한 요소의 하나를.
상대 또한 나를 알아본 듯 시선을 맞춘다. 이미 초점 없는 눈으로 골똘히 생각하던 중이어서 내가 못 알아본 것으로 인지한 것 같다. 다행이다. 덕분에 모면했다.
사람의 뇌는 참 성능이 좋다.
구별에 특화된 나의 감각과 뇌의 분석력이란! 이 와중에 이딴 것을 알아차리고 분석하고 확신까지 한다.
오늘은 나의 고유능력이 힘겹다.
아직 술을 사지 못했는데, 가는 길이 더 멀어진 기분이다. 귀에 들리는 잔잔한 음률과 각각의 관심거리로 바쁜 사람들 사이를 지나 캔맥주를 산다. 몸을 구부리면 오히여 힘이 빠지기에 허리를 바로 펴고 넓은 보폭으로 정확한 리듬을 유지하며 걷는다.
패닉룸에 들어 선 나는 캔뚜껑을 딴다.
맥주 두 캔으로 두근거림을 술 때문이라고 속인다.
오후를 겨우 보냈다.
그리고 하루는 오후를 지나, 밤에 앞서 저녁이 있다.
아들과 남편이 함께 하는 저녁.
공황은 왔고, 정도는 작고 시간은 짧게 지나가라는 나의 바람은 철저히 무시되고 점점 증폭된다.
나는 왜 도움을 청하지 않는가?
나는 청할 수 없다. 대신 숨을 곳을 찾는다. 패닉룸, 나의 작업실로 향한다.
원래 의도와 벗어나버렸다. 작업실에서 나는 불안 그 자체다. 책상과 싱크대 사이 문을 지나 책장을 지나 6인 탁자와 책상 사이를 걸어 다닌다. 고개 숙인 나의 눈에 들어온 나의 발 각도가 벌어져있다. 팔자걸음. 의식적으로 모아 보지만, 몸을 세우기 힘들다.
난 지금 자각 중이다. 곧 다음 단계로 넘어가 항상 있던 저녁시간을 거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극복, 인내, 이건 무엇이라 명명할 것인지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귀를 틀어막듯 높일 대로 높인 이어폰은 세상의 소리를 차단했다. 그리고 재생이 끝난 순간, 고요와 함께 찾아온 세상의 소리가 낯설다. 냉장고의 절절저르르절절 소리, 창밖에 바람이 부는 소리, 오토도토도토 문득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에 오히려 차분하다. 후우웃후욱 휘오옥 후우. 심상치 않은 바람소리에 정신이 난다. 분명히 괴롭다. 괴로웠다.
괴로움이 조금은 사라졌고, 환기가 되었다.
공황.
내가 아는 내가 아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