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중4
무언가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 특히 일정한 시간과 행동에 즐거움이 곁들여졌다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상실감이나 허탈감 같은 것이 그 시간을 차지한다. 꼬꼬마 까마중이 그렇다. 이건 뭐 내성적 성향의 기질적 패턴일까? 어쨌든, 꼬꼬마는 생이 아닌 사의 길로 접어들었고. 나는 미련이 생겼다. 나름의 애정과 바라보는 행동이 접어지지 않는다. 사(죽음)의 길로 가버린 후에 오히려 집착이 생겼다. 토요일만 보기로 했던 것이 목요일도 보고 토요일도 본다. 매주 수업이 있는 이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고는 확인하러 간다. 왜 이럴까?
동물은 스러진다는 말을 안 쓴다. 식물이나 그것으로 형성한 것들이 분해되어 가는 과정을 스러진다 한다. 또는 문학적으로 서서히 무너지는 명성이나 업적, 유적에 쓰인다. 스러진다.
참 쓸쓸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의 꼬꼬마는 스러지지 않았다. 연하고 무른 잎과 꽃과 줄기가 사라졌지만 아직 굵은 줄기와 열매의 흔적 하나가 갈색을 띠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과정이다. 안다. 그런데 슬프거나 안쓰럽지 않다.
오늘은 내가 알지만 확실하지 않은 다음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리고 나 또한 이에 속한다.
영양분과 수분의 이동을 멈춘 섬유질에 열매의 흔적 하나가 동그랗게......
이제 안 찾아가도 되련만 나는 왜 자꾸 학교에 오면 맨 먼저 여길 찾아와 꼬꼬마를 찾을까? 전과 조금씩 달라진 것을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다. 까마중도 그렇지 않을까?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는데, 꼬꼬마 까마중과 나와의 의미는 뭣인가?
집, 그 한정된 공간에 앉거나 눕거나 아무 생각이 없거나 뭐 그런 상태로 목적을 상실한 채 살아 본 적이 있다. 늪보다 개미지옥보다도 조용히 숨 막히지만 살아지는 순간. 서른 중반 약 1년을 그렇게 살아봤다. 나는 그것을 소극적 자살이라고 부른다. 솔직히 지금 공황이 왔음에도 소극적 자살을 선택하지 않은 내가 대견했다. 하지만 극복이 아니고 원하지 않는 신체반응이 오는 것은 무섭다. 다행인 것은 헬스장을 다녔던 것과 나에게 매일 움직여야 하는 강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이유로 산책이 힘들지 않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었다.
꼬꼬마에게는 내가 증인이다. 척박함을 뚫고 살았고, 여물지 못했지만 열매를 맺었으며, 그 죽음은 아직도 꼿꼿하다.
바람에 비에 조금씩 스러지는 모습이 올해 보았던 연극의 무대가 생각난다. 대배우 박근형 님과 신구 님의 마지막 앙코르 공연인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 그리고 그곳에 서있던 고목 같다. 고목이 있어 달이 외롭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까지 고목을 내려다보는 달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