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쓰기와 비밀 풀이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태어날 때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뱃속에서 젖어있던 수중의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눈물은 본디 한 번도 훼손되지 않은 최초의 기억을 향해 나아감으로 안정을 되찾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명현 현상 같은 것이다.>
이준호와 조마리가 받아쓰기 시험을 보았다. 준호가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약 7센티미터 두께의 자주색 책을 꺼내 정중간을 펼쳐 이러한 구절을 찾았다.
눈물이 잦은 조마리에 비해 이준호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조마리와 이준호가 눈물을 배워가는 과정은 달랐다. 서로 시험지를 바꾸어 채점을 해보니 조마리는 띄어쓰기에서 2개를 틀렸고 이준호는 받침 3개와 띄어쓰기 1개를 틀렸다. 어린아이처럼 틀린 글자를 보고 표정이 나빠졌다. 마리가 스스로에게 묻듯 물었다. ‘눈물이 뱃속의 기억을 가리킨다고......?’ 준호가 마리를 보았다. 가끔은 잊었던 고향을 떠올리듯 두 천사였던 기억을 떠올렸다. 마리가 준호에게 말했다. 우리도 태어났을까? 준호가 마리에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마리와 준호는 각자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할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갔다. 한참 후에 깨닫게 된 일이지만 천사였던 준호와 마리가 삶, 그 자체를 원하게 된 계기는 서재로부터 출발했다. 할아버지의 서재에 오래된 갈색빛 책장 속을 옛 고서와 현재에 이르는 책들이 가득 메꾸고 있었다. 서재에서 바라보는 창밖의 나무들이 오솔길의 나무들처럼 나란히 서있었다. 마리와 준호는 하루종일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다. 얼핏 이야기에 빠진 듯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숨은 얼굴에 숨은 마음은 팔랑거리는 나비를 좇아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마리와 준호는 열아홉 살 정도의 얼굴이었다.
창을 마주 보고 앉아있던 마리가 노을이 저녁을 만드는 모습에 고개를 들었다. 저녁이 맛있게 익어갔다. 창문 아래쪽에 준호가 책으로 얼굴을 덮고 잠에 들었다. 마리가 무릎을 감싼 채 준호를 들여다보았다. 준호가 책을 내리고 반쯤 감긴 눈으로 마리와 눈을 마주쳤다. 한 순간 긴 여운을 뒤로하고 이준호가 마리에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열아홉 살이었던 해, 우리가 의례를 치르던 생일 밤 기억해?
응. 우리가 했던 모든 의례는 다 기억하지.
그때, 할아버지 하고 눈이 마주쳤어.
뭐? 우린 어떤 육체도 없었어. 눈도 귀도 없던 때야.
응. 그런데 할아버지는 응시 이상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어.
음... 그렇다고 해도 그게 왜?
할아버지가 그러고는 울었거든. 나는 할아버지의 생각을 봤어. 할아버지가 떠 올린 기억.
무슨 기억?
할아버지가 아직 태어나기 전, 양수에 떠 있던 처음 기억.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는 기억이라 아무런 훼손도 당하지 않은 깨끗한 기억이었어.
어떤 느낌이었어?
구원.
준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할아버지가 열아홉 살이었던 그 해의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같은 반 여자 아이와 학년 내내 다투었다. 여느 날처럼 공백도 없이 써 내려간 긴 편지를 통해 얼마나 여자 아이를 증오하는지 밝혔다. 마지막 교시가 끝나고 교활한 장난을 실행했는데 그 일로 여자 아이가 실명하게 되었다. 일방적인 몸싸움이 아니었어도 상대방에게 가해진 상해의 결과가 몹시 커서 할아버지와 주변 모두의 실망은 보통의 일이 아니었다. 몇 달 후에 여자아이의 시력이 기적처럼 회복되었지만 당시 할아버지는 지옥의 감옥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에서 죽음과 유사한 어떤 상태를 겪어야 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생일에 두 천사들의 의례를 지켜보며 막지 못한 일에 대한 원망을 품고 천사들을 노려보았다. 천사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했을 뿐 막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권한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생각했다. 이 무능한 천사들이 언젠가 사람이 되어 자신과 똑같은 일을 당했으면 바랐다. 눈물이 나왔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완전한 보호를 받으며 태평한 아기일 뿐이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할아버지는 심리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환자들을 돌보고 책을 냈다. 할아버지의 삶에 죄책감이 드리울 때마다 자신 때문에 한쪽 눈의 시력을 잃을 뻔한 여자 아이에 대한 죄책감이 소급되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새로운 시각이 생겼고 당시를 회상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난 몸과 정신의 상태에 대해 상고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정신을 분석할 뿐만 아니라 꿈을 통해 나타나고는 하는 무의식과 의식에 대한 관계 역시 연구하고 결과를 논문의 형태로 혹은 책으로 냈는데, 준호가 찾아낸 책이 <눈물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기록한 자주색 책이었다.
받아쓰기 놀이는 준호와 마리가 공통적으로 하루종일 할 수도 있는 재미있는 놀이였다. 자주색 책은 3일 만에 헌 책이 되어버렸다. 받아쓰기 놀이와 함께 병행되었던 하나의 놀이는 자주색 책에서 발췌되었다. ‘이성이 서로를 탐색하기 위한 절차를 밟는 과정으로 공격성을 보인다는 이론’을 읽고 준호와 마리는 서로를 괴롭히는 놀이를 만들었다. 이 놀이의 규칙은 한 가지뿐이었다. 눈물을 보이는 쪽이 폐자가 되고 게임은 끝난다. 어느 때는 말로 어느 때는 힘으로 겨루었다. 정신적 게임의 결과는 비등했고 힘을 겨루는 게임의 결과는 준호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준호가 두 팔로 마리의 두 손목을 힘주어 잡으면 마리는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이 게임은 준호 쪽에서 먼저 포기하게 되었는데 준호는 스스로 울지 못했으나 타인에 대한 공감으로 마리가 느끼는 폭발적인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야 말았다. 어느 날부터 게임의 끝은 승자 없이 두 천사의 눈물로 막을 내렸기에 괴롭히기 놀이는 잊혔다. 준호가 흘리는 눈물은 태어난 사람의 젖은 눈물이라기보다 할아버지의 슬픔이 만들어낸 간접 눈물이었다. 할아버지가 떠올린 뱃속 기억을 보고 타인에게 공감함으로 만들어진 눈물. 그러나 마리의 눈물은 설명할 수 없었다. 먼 훗날 깨닫게 된 일이지만 마리는 삶의 요소를 누리며 만족을 얻는 일부분이 아닌 삶의 전부, 그 자체,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했다. 할아버지의 서재는 준호와 마리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가게 했다. 원하는 것을 찾아 자신이 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