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영의 May 17. 2024

11. 왜 우세요? 시가 안 써져서 우세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와 함께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봤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라는 시 <아네스의 노래>는 영화의 주인공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시이다. 나는 지금 이 시에 가수 박기영이 곡을 붙인 노래를 들으며 이 글을 고쳐쓰고 있다. 영화의 한 장면, 장면이 아련하게 떠오르며 마음이 따뜻해지는가 하면 아려오기도 한다.


  영화의 주인공 미자는 요양보호사로 생계를 잇지만 이순을 넘긴 나이에 시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미자는 치매 진단을 받는 한편 투신자살한 소녀 아네스의 죽음에 자신의 손자가 일부 책임이 있음을 알게 된다. 다른 학부형들은 자식들의 죄를 돈으로 덮기에만 급급하고 학교 당국도 은폐에 적극 동조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시를 쓰려고 하는데 실제의 세상은 너무나도 남루하고 추악하다. 미자는 시 낭송회장의 한구석에서 복받치는 감정을 부여안고 오열하고 만다. 울고 있는 미자에게 누군가가 묻는다, “왜 우세요? 시가 안 써져서 우세요?”      


  연암은 만리장성의 고북구를 8월 7일 한밤중에 만난다. 말을 세우고 올려다보니 성은 가히 여 길은 된다. 칼을 꺼내어 이끼를 긁어내고, 붓과 벼루를 꺼내고 술을 부어 먹을 갈아 장성을 어루만지며 성벽에 글자를 쓴다.


건륭 45년 경자년 8월 7일 밤 삼경,

조선의 박지원 여기를 지나가다


그리고 한바탕 웃는다. 와보니 과연 장성은 산을 파내고 계곡을 메웠다. 고갯마루를 넘어가는 상현달의 싸늘한 빛은 숫돌에 벼린 칼과 같고 달이 더욱 내려가 양쪽에 뾰족이 드러나더니 홀연히 붉게 변하여 횃불 두 개가 된다. 산천의 경관과 요새와 관문의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없이, 상현달이 관문을 비껴 비추고 양쪽 절벽이 깎아지른 백 길 낭떠러지가 되어 그 사이로 길이 났다.      


  김창업과 홍대용도 못 본 열하를, 머리털이 희끗희끗한 한낱 서생으로 온 건 크나큰 행운이다. 한스러운 건 벼루는 작고 붓은 가늘며 돌에는 이끼가 끼고 먹물은 말라 큰 글자로 이름을 쓰거나 시를 남기지 못한 것이다. 크게 쓰는 것은 특별히 크게 말하는 것일 터이다. 여기에 써놓으려고 칠천 리를 달려오며 구절을 다듬으려고 하루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런데 이 한 편을 겨우 시도하자 문장이 쇠잔하고 나약하여 보잘 것 없다. 호곡장에서는 한바탕 울어봄 직도 했지만, 이 장성 앞에서는 울 수조차 없다. 압도당하여 웅장한 관문을 빠져나가는 기개를 그려낼 수 없이 할 말을 잃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이 나에게는 고스란히 전해져 시 하나로 이어진다.


백두산의 바윗돌은 칼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다 말리리라.

남아 이십 대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누가 있어 나를 대장부라 불러주리오 .


  남이장군의 시다. 백두산의 바윗돌을 칼 갈아 없애고 두만강의 물을 말에게 먹겨 말릴 만큼 호탕한 스무 살 젊음의 기개는 그의 발목을 잡는다. 이 시 탓에 그는 간신의 덫에 걸려 형장의 이슬로 스러지고 만다. 마흔네 살 연암에게 스무 살 남이의 기개가 없던 것이 나로서는 천만다행이다. '기개가 없다'는 그의 말이 그냥 겸손의 말인지 그의 시가 정말로 기개가 없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이때 쓴 글 <야출고북구>는 천하의 명문으로 길이길이 남았다. 나는 그 글 일부를 인용했는데 그의 말대로 그의 문장이 쇠잔하고 나약하여 보잘 것이 없는지 여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내가 피리를 불어도 네가 춤추지 않고, 내가 통곡해도 네가 울지 않는 시대, 너는 너고 나는 나인 차가운 시대, 마침내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치병으로 죽음을 앞둔 요양보호사 미자는 솔방울을 맺는 병든 소나무처럼 오롯이 삶을 담 시를 쓴다. 그 시 <아네스의 노래>는, 시를 쓰지 않은지 여러 날이 흐른 나의 가슴에 허연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남이의 시도 연암의 시도 평생 쓰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기개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오롯이 나의 삶을 써낼 수가 왜 없겠는가. 어쩌다가, 남의 삶에 내 고단한 삶을 빗대어 오열하노라누군가는 물으리라. "왜 우세요? 시가 안 써져서 우세요?"  

작가의 이전글 4. 도서관 가는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