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화신((1750~1799년)
새삼스럽게 연암이 참 많은 인물을 소개했음을 깨닫습니다. 연암의 인물들 중에서 가장 큰 빌런이라고 할까요? 바로 청나라의 호부상서 화신입니다. 지금의 재무부 장관인데 건륭제와 가경제 연간의 대신이었습니다. 그는 머리가 뛰어나 어릴 때부터 만주어, 중국어, 몽골어, 티베트어 등 4개 언어에 능통하였다고 합니다.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휘두르며 부를 축적했습니다. 엄청난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 돈을 물쓰듯 하는 황제가 원하는대로 비용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수수료를 과하게 떼었던 것이지요.
1780년 연암이 본 화신은 눈매가 밝고 수려하나 얼굴은 준엄하고 날카롭게 생긴, 덕과 그릇이 작아보이는 인물입니다. 갓 서른하나 젊은이입니다. 교활하여 붙임성이 뛰어나 원래 졸병으로 시작하여 오륙 년 사이에 고속 승진을 했답니다. 27세(1776년)에 호부시랑, 31세(1780년)에는 호부상서로 초고속 승진을 하였습니다. 호부상서 화신은 병부 상서와 함께 항상 황제의 좌우에 섰습니다. 매화포 불꽃놀이를 할 때도 건륭제와 반선의 곁에서 차를 따라 올렸지요. 화신도 라마교를 믿어 건륭제가 봉헌을 드릴 때에는 항상 수행했습니다. 대신의 지위에 있어도, 화신은 황제가 가래를 뱉을 때 즉시 그릇을 받쳐들고 받아내었습니다.
화신은 이부상서, 병부상서, 형부상서 등 6부 상서를 모두 지내고 국자감 교장을 거치며 내무부총관과 사실상의 재상인 문화전대학사 겸 군기대신에까지 두루 요직을 거칩니다. 그 후 40대에 정황기의 영시위내대신을 거쳐 실제로 재상에 해당되는 수석군기대신에 이릅니다. 4개 국어의 국서를 능수능란하게 쓰고 적절한 정책을 내놓아 임무를 잘 해내는 정치적 능력도 갖추었답니다. 1789년 아들이 건륭제의 막내딸과 혼인한 후에는 권력을 남용하여 반대 상소는 빼돌리고 조정 대신들은 자신의 파당에 끌어들여 탄핵을 피했다지요.
구문은 연경의 안쪽 성에 딸린 아홉 문입니다. 아홉 문마다 각각 아홉 종류의 마차가 다닙니다. 조양문에는 곡식 마차가, 승문문에는 술 마차가, 정양문에는 황제의 가마가, 선무문에는 죄수 마차가, 부성문에는 석탄 마차가, 서직문에는 물 마차가, 덕승문에는 군인 마차가, 안정문에는 분뇨 마차가 동직문에는 건축자재 마차가 다닙니다. 딱 봐도 구문제독의 지위가 얼마나 막강한지를 알 수 있고 그 제독을 거느리는 호부상서 화신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됩니다. 어린 아들을 여섯 살짜리 황녀와 약혼을 시켜 황제가 총애하는 막내 공주를 예비 며느리로 두니 눈에 보이는 게 있겠어요?
화신은 죄를 지은 지방 관리들에게 벌을 안 받게 해주겠다며 뇌물을 받습니다. 그것으로 황제의 비용을 충당하는 자신의 딴 주머니로 채웠어요. 고관 이시요가 해명에게서 금 200냥 뇌물을 받은 사건을 잘 처리하여 이시요를 투옥하고 해명은 유배를 보냅니다. 연암의 벗 중의 하나인 기려천이 그 대신 귀주 안찰사가 되었어요. 여천이 화신에게 빌붙어 해명을 적발하고 그 자리를 꿰찼다고도 합니다. 우민중의 집은 몰수하고 아계 장군은 외직으로 내쳐 강물 관리나 시킨 것이 불과 서너 달 전의 일입니다. 그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아 화신을 보는 사람마다 눈을 흘긴다네요.
연암이 보니 궁궐 문 앞에 짐이 일곱 개 있습니다. 옥그릇과 옥공예품 그리고 사람 키만한 금부처가 있습니다. 심지어 진주로 만든 포도 한 시렁도 있답니다. 금과 은, 오동으로 색깔을 내어 포도나무의 넝쿨과 잎을 만들고 보배 구슬의 일종인 화제주와 푸른색 보석인 슬슬로 포도송이를 만든, 만수절 생신 축하 물품입니다. 공직자 봉급으로 값비싼 진상품을 아끼지 않고 올리니 그게 어디에서 났겠습니까?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한 일 년만 근무하면 집을 사는 공직자가 있었습니다. 화신도 집깨나 샀나 봅니다. 주해에는 청나라 최고의 탐관오리라고 나옵니다.
건륭제의 선왕인 강희제가 귀한 진상품을 바치는 길을 터놨답니다. 누가 왕진경의 그림을 헌상했는데 그 뒷면에 소동파의 시가 있어 황제가 기뻐했답니다. 그러니 금부처와 진주 포도를 바치는 게 예삿일이 되었습니다. 건륭제도 선물을 받으면 “화신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이 귀한 것을 자기가 소장하지 않고 헌납하다니”라고 말하겠지요. 그런데 천하의 부를 독차지한 황제가 못 가진 것을 화신은 어디에서 얻었을까, 라고 말하는 날에는 화신의 목이 위태로워지겠지요. 그날이 가경제 4년(1799년)에 옵니다. 화신은 공주 며느리 덕에 능지형을 면하고 목매어 자진합니다. 몰수된 그의 재산은 9억 냥으로 국가 예산 12년치를 웃돌았답니다. 황제가 그걸 내탕금으로 사용하여 화신이 거꾸러지자 배불리 먹었다네요.
열하일기는 총 세 권으로 되어 있는데 잊을 만하면 화신이 나옵니다. 까도 까도 속이 안 보이는 양파 스타일의 연암이 내심 누구를 빗대지 않았을까 싶어집니다. 떠오르는 것은 당대의 권신 홍국영입니다. 홍국연은 정조 임금의 절친으로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범하지 않는 한 문제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방패로 삼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젊은 연암은 그의 서슬 푸른 칼날을 피해 한동안 은거했는데 홍국영의 권력은 십 년을 못 넘겼습니다. 연암의 마지막 언급이 씁쓸한 입맛을 남깁니다. “세도의 승침이나 인심의 선악이, 모두 윗사람으로부터 인도되지 않음이 없다” 황제가 그런 신하를 원하니 곁에 뒀겠지, 안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