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에 나오는 許生傳
우리 부부는 묵적골에 산다. 줄곧 남산 밑에 닿으면 우물터 위에 해묵은 은행나무가 서 있고, 사립문이 그 나무를 향하여 열려 있으며, 초옥 두어 칸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한 채 서 있는 곳에 있는 오두막이 우리 집이다. 허생이 나의 남편이다. 남편은 글 읽기를 좋아하는 선비다. 덕분에 코끝에는 오뉴월에도 항시 고드름이 매달려 있다(열하일기 1권 128쪽) 그도 그럴 것이 장작불을 때지 못하여 방바닥은 온돌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냉골이라 방안에는 싸늘한 바람만 감도니, 감기가 떠날 새가 없다. 이불이라도 뒤집어쓰면 좋으련만 남편은 새벽 네 시면 일어나 이부자리를 잘 정돈한 다음 등불을 밝히고 꿇어앉는데, 앉을 때는 정신을 맑게 가다듬어 눈으로 코끝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두 발꿈치는 가지런히 한데 모아 엉덩이를 괴며, 그 자세로 꼿꼿이 앉아 책을 얼음 위에 박 밀 듯이 술술 외운다(양반전)
나는 남의 바느질품을 팔아 입에 풀칠을 하고 산다. 한때는 양반집 규수였기 때문에 내 바느질 솜씨는 꽤 좋은 편이다. 바느질 일은 바느질 솜씨가 좋지 않으면 맡기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밥은 날마다 먹는 반면, 바느질은 띄엄띄엄 들어오는지라 벌이가 들쭉날쭉하다. 하루는 배가 몹시 고팠다. 서러움이 넘쳐흘러 나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도대체 며칠을 굶었을까. 속담에 사흘 굶어 남의 담을 안 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나도 사흘은 굶었나 보다. 하늘 같은 서방님한테 작정하고 바가지가 술술 긁어졌으니 말이다. 나도 안다. 남편은 진지하게 공부하는 사람이다. 기생 집을 드나들거나 노름을 하거나 술을 지나치게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과거도 안 보는 글을 왜 읽느냐는 말이다. 과거만 본다고 했으면 아무 말도 안 했을 거다. 저런 사람이 합격하지 않으면 누가 합격하겠느냐. 이거 하나만은 남편을 믿는다.
그런데 남편이 지나치게 여유롭게 반응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정신을 잃었다. 공장이나 장사치 심지어는 도둑질이라도 하라는 독설을 뱉어버리고 만 것이다. 잘 참다가 칠 년 만에 어쩌다 바가지를 한번 긁은 건데 남편은 밉살스럽게도 긴 탄식을 한다. 십 년 공부를 칠 년 만에 중단하는 것이 애석하다는 것이다. 길을 막고 물어봐라. 어떤 아낙이 칠 년이나 공부에만 매진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입 다물고 견뎠겠는가. 하다못해 외출을 하겠다고 말 한마디라도 했다면 뭐라 하지 않겠다. 말했으면 바느질품 파는 아낙이 그래도 남편의 입성은 봐줄 만하게 시중을 들었을 거 아닌가. 남편은 허리에 두른 실띠의 술이 다 빠졌고, 가죽신의 뒷굽이 자빠졌으며, 망가진 갓에 검은 그을음이 흐르는 도포를 걸치고, 코는 맑은 콧물을 훌쩍훌쩍하는 영낙없는 비렁뱅이의 꼬라지를 하고 집을 나선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 길로 한양 최고의 부자 변씨를 만나 만 냥을 얻었다고 한다. 부자는 달라도 뭔가 다르다. 그가 보기에도 내 남편이 그리 만만하게 보이지는 않았나 보다. 칠 년이나 두문불출 책만 읽어댔으니 머리나 마음으로는 거의 공자 맹자가 다 되었다. 옷과 신이 떨어진들 주눅이 들었을 리 없으며 말은 간단하고 눈빛은 오만하고 얼굴에 부끄러움 따위는 없었으리라. 항상 쪼들리는 살림살이에도 그는 진즉 스스로 만족하고 지내는 성정이었다. 책 읽는 것 외에는 뭘 하려고 들지를 않아 암것도 안 했지만 뭔가 하려고 시도를 했다면 반드시 잘 해냈으리라. 그게 변씨 눈에도 보였던 게다. 하지만 변씨만이다. 다른 이들은 뭐 저런 놈한테 돈을 몽땅 쥐어 주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저 누구 만나러 간다고 한 마디만 했어도! 남들이 그이의 행색을 보고 나를 어떻게 생각했겠냐구!
남편은 안성에 자리를 잡아 못된 짓거리를 했다고 한다. 과실을 두 배 값으로 사서 십 배 값으로 되팔았다는 것이다. 산 사람 입에야 거미줄을 치지 않을망정 죽은 사람 입에는 거미줄이 치기 마련인 것을, 어떻게 온 나라 귀신이 제삿밥을 굶도록 수작을 부리느냐 말이다. 자신도 명색이 양반이면서 제사를 건드리다니, 뭐에 씌웠음에 틀림없다. 제주도의 말총을 독점하여 망건 값을 십 배나 올렸다고도 한다. 그 돈으로 제주도 서쪽으로 사흘 거리인 빈 섬을 찾아 부자노인네 노릇을 했단다. 텅 빈 섬도 덕만 있으면 사람이 저절로 찾아드니 걱정할 것은 자신의 덕 없음이지 사람 없음이 아니라는 거룩한 어록도 날렸다고 한다. 변산의 도적떼를 불러들여 집 짓고 농사 지어, 삼 년 식량을 남기고 나머지는 내다 팔아 재산이 은 백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중 50만 냥은 바닷속에 던지고 뭍으로 돌아와 두루 나눠 주고도 십만 냥이 남았단다. 이것은 남편이 돌아온 다음에 여기저기 소문을 긁어모은 것이고 당시에야 무소식은 희소식이 아니라 그냥 캄캄절벽이었다.
돈을 버린 것도 기가 막힌 일이지만 열 보 양보하여 십만 냥만 남았을 때라도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조강지처에게, 흰쌀밥에 고깃국을 끓여 밥상을 눈썹에 대고 남편에게 올리는 모양새를 취하게 해주었다면 하늘보다 높은 나의 원과 한이 봄눈처럼 녹아버렸을 것이다. 변씨로부터의 거액 대출 사건은 한양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라 소문이 쫙 퍼졌지만, 그 이후 일은 아는 이가 없어 남편은 오리무중이자 행방불명이 되었다. 선비가 뭔 장사를 해봤느냐. 망했나 보다. 퍼렇게 살아있는 선비의 자존심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이라도 했나, 하고 벼락맞을 생각도 들었다. 나는 남편이 집을 나선 이후로 대문을 걸어 잠근 적이 없고 편안히 잠든 적이 없었다. 처마 밑에 호롱불 하나 달아놓고 행여 그이가 돌아오나 기다리는 세월이 오 년이 되었다. 나는 그이가 떠난 날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자기의 제삿날 그가 돌아왔다. 초혼(招魂)을 한 것도 아니니 혼령일 리도 없는, 자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마누라 옆으로, 마지막 십만 냥조차 넘겨버린 빈손으로. “나 왔네”가 그의 첫 말이었다.
이튿날 변씨가 은을 가져왔다. 남편이 받을 리가 있으리오마는 제발 받았으면 했다. 물론 남편은 받지 않았다. 부자가 될 생각이었으면 백만 냥을 버리고 십만을 취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식구를 헤아려 식량과 베를 마련해주면 만족하겠다는 것이다. 기왕 ‘준다’ 소리 들었을 때 장작이랑 변변한 옷가지도 ‘달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변씨는 틈틈이 일용품을 날라다 대었지만, 남편은 행여 그가 가져온 물품이 넉넉하다 싶으면 즉시 재앙을 주느냐고 감사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어쩌랴, 저러지 않으면 내 남편 허생이 아닐 것이다. 다만 변씨라는, 끼리끼리 논다는 속담처럼 남편 못지않게 이상한, 말벗이 너나들이 없이 정이 깊어지는 것 하나는 보기에 좋았다. 더 좋은 것은 그 변씨가 입만 오지 않고 술과 안주까지 들고 오는 것이다. 변씨가 오는 날은 우리 집 생쥐들한테도 잔칫날이다. 또 한 번 바가지를 긁었다가는 백만 냥이 아니라 천만 냥을 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올까 봐 나는 오늘도 지긋이 입술을 깨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