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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Oct 28. 2024

14. Mr.변의 허생전2

  

나 변씨는 한양에서 둘째 가라 하면 서러워할 부자이다. 그런데 묵적골 사는 허생이 나의 벗이다. 허생은, 줄곧 남산 밑에 닿으면 우물터 위에 해묵은 은행나무가 서 있고, 사립문이 그 나무를 향하여 열려 있으며, 초옥 두어 칸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한 채 서 있는 오두막집에 산다. 최고의 부자와 최고의 가난뱅이 남산골 샌님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극과 극은 통한다고 대답하겠다. 한때 나는 허생에게 두 말도 없이 만 냥을 신용 대출해 주었는데 칠 년 동안 책만 읽었다는 허생은 책으로 경제만 배웠는지 오 년 만에 십만 냥을 가져왔다. 내 눈으로 안 봤으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허생은 오히려 돈 버는 게 남 못할 더러운 짓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를 장사치 취급하냐고 노발대발하기까지 했다.


몇 년간 함께 술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친분을 쌓은 끝에 허생과의 교분이 두터워졌다. 그제서야 허생의 치부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내가 돈을 꾸어줄 줄은 어떻게 알았냐고도 물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만 금을 가진 자라면 누구든지 자기에게 빌려 주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백만 금을 벌 능력은 있소. 그러나 진짜로 백만 금을 벌고 못 벌고는 하늘에 달렸으니 장담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를 활용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일 것이고 그 부자는 반드시 더 큰 부자가 될 겁니다. 하늘이 그렇게 명하시니 돈을 빌려주지 않을 수 없지요. 내가 만 금을 얻어낸 다음에는 그 사람의 복에 의지하여 장사를 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성공했던 겁니다. 만약 내가 내 돈으로 사사로이 뭔가를 하려고 했다면 그 성패는 장담할 수 없었겠지요."


큰 부자는 하늘이 낸다는 말은 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부를 쌓으며 하늘이 나를 돕는다고 느낄 만큼 짜릿한 순간도 없지는 않았다. 집안에 처음 재산이 불어날 때는 마치 그렇게 되라는 명운이 있던 것 같더라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하늘의 복을 받은 자라는 말을 허생의 입에서 직접 들으니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때, 나도 모르게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상인인 주제에, 상인의 것이 아니고 선비의 것인 나라를 걱정한답시고 두고두고 후회할 소리를 불쑥 뱉어버린 것이다.


“시방 사대부들이 남한산성의 치욕을 씻으려는 지금이야말로 뜻있는 선비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지혜를 떨칠 때입니다. 당신은 그런 재주를 가지고 어찌 어둠에 파묻혀 일생을 마치려고 합니까?”라고.

“자고로 어둠에 파묻혔던 분들이 어디 한두 분이었소?”라고 되물으며 허생은 두 사람의 이름을 들었다. 졸수재 조성기와 반계 유형원이다. 허생의 말에 따르면 조성기는 적국에 사신으로 보낼 만한 인물이었다. 명분과 국익을 함께 지킬 수 있는 학식과 언변을 가진 그를 사신으로 쓸 법도 하건만 아무도 그를 쓰지 않았다.

반계 유형원은 진심으로 북벌 상소를 올린 선비였다. 그는 마을을 이루고 병력을 길러 훈련했으며 매일 300리 말달리기를 연습하며  큰 배 사오 척과 말들을 바닷가에 비치하며 사람을 보내어 중국의 정세를 살폈다. 그러나 그가 군량미를 조달할 능력이 있으면 뭐 하나. 써주는 사람 하나 없이 바다 한 귀퉁이 부안 변산에서 서성거렸을 뿐이다!


허생이 오백만 냥을 바다에 던진 일을 언급했을 때 나는 애석했지만, 그 어마어마한 돈을 그렇게 버렸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이 나라 안에서는 쓸 데가 없더라는 말에 공감했을 뿐이다. 돈이 쓸 곳을 찾지 못하면 나라님도 가난을 구제하지 못한다. 바닷물이 마르기나 해야 구왕의 모가지도 살 수 있는 그 돈을 비로소 얻으려나. 구왕은 청나라의 예친왕 다이곤이다. 어린 조카를 옥좌에 올리고 섭정의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다. 졸수재와 반계를 쓰지 않은 사대부들이 허생은 쓰겠느냐, 크게 탄식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도 나는 내 어리석음을 다 깨닫지는 못했다. 돈으로도 움직이지 못했던 이 남자를 명예와 권력이라면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레 짐작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만 이완에게 허생의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어영청 대장 이완은 무기를 제조하고 성곽을 수축하고 있었다. 왕년의 봉림대군이었던 효종임금이 북벌을 적극 주창하고 있던 것이다. 이완과는 본래 각별한 사이였으니, 쓸 만한 재주가 있 대사를 함께 도모할 인물이 있느냐 물음에 어떻게 허생 이야기를 안 할 수 있느냐 말이다.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이완은 아랫사람을 물리치고 나와 함께 걸어 허생의 집으로 갔다. 이완한테는 문밖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나는 혼자 먼저 들어갔다. 허생을 보고 이완이 이러저러한 연유로 여기에 와 있다고 일렀다. 허생은 내 이야기를 듣고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만, 자네가 차고 온 술병이나 이리 풀어 놓으시게” 하고는 서로 즐겁게 술을 마셨다. 이완을 밖에 하릴없이 세워놓은 나는 적지 아니 민망하였다. 여러 차례 말을 꺼내 보았으나 허생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밤이 깊었다. 허생이 말했다.

“손님을 불러도 되겠소.”

옳다구나, 하고 얼른 밖으로 나와 이완을 불렀다. 이완이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허생은 앉은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손님이 들어오면 일어나 인사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몸 둘 바를 모르고 엉거주춤하던 이완이 겨우 나라에서 어진 인재를 구한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허생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밤은 짧은데 말이 너무 길어 듣기가 지루하구먼. 그래 너는 무슨 벼술을 하느냐?”

“어영청 대장입니다.”

나이는 있다손쳐도 임금의 심복인 어영청 대장을 상대로 허생은 대뜸 반말을 한다. 그래도 이완은 허생의 말을 탓하지 않고 꼬박꼬박 말을 받았다. 허생이 말했다.

“신임받는 신하로군. 그러면 내가 재야에 숨은 와룡선생을 천거할 터이니 임금께 아뢰어 삼고초려를 하게 하겠는가?”

이완은 머리를 숙였다.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나는 이미 알아차렸다. 이완은 임금에게 삼고초려를 시킬 능력이 없다. 이 나라 임금은 오랑캐 천자에게는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도 와룡선생한테는 못 한다. 신하된 자가 감히 가타부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차라리 이완은 허생을 이끌고 임금에게로 갔어야만 한다. 임금이라야 ‘내가 하겠다’고 말할 수 있다.


한참 만에 이완이 말했다.

“어렵겠습니다. 그다음의 것을 듣고자 합니다.”

이미 예측하고 있던 대답이다. 허생은 실망을 애써 감추며 이렇게 빈정거렸다.

“나는 그다음이란 말은 배운 적이 없거든.”

이완이 거듭 묻자 허생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명나라 장병들이 조선에 은혜를 입힌 적이 있어 조선으로 많이 건너왔다. 홀몸으로 이리저리 떠도는 처지이니 임금께 아뢰어 종실의 여자들을 시집 보내고 공신들의 집을 몰수하여 살림집으로 내주겠느냐?”

나는 이 질문에 놀랐다. 꿈조차 꾸어본 적이 없는 질문이다. 종실의 여자를 중국인과 결혼을 시켜? 더구나 공신들의 집을 빼앗아? 이런 일은 생각만 해도, 입 밖에만 내도 역적으로 몰릴 말이다. 이거, 이거, 내가 허생을 사지로 내몬 건 아닌가? 상대가 이완이라 천만다행이지만 나중에 이완에게 말조심을 시켜야겠다.

이완도 대경실색했다.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대답했다.

“그것도 어렵겠습니다.”

“아니,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대관절 무슨 일이 가능하냐? 아주 쉬운 일은 하겠느냐?”


그러면서 허생은 도도하게 설파하기를 시작했다.

당나라, 원나라 때처럼 청년들을 청나라에 보내어 유학과 벼슬, 장사를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머리를 깎아 변발하고 오랑캐 옷을 입되 선비는 빈공과에 응시하고 서민은 장사를 하여 그들의 허실을 엿보고 한족 호걸들과 결탁하면 천하를 도모하고 나라의 수치도 씻을 것이다. 명나라 황족 주씨의 후손을 찾거나 천자가 될 사람을 추천받아 황제로 올리면 덩달아 조선의 국위도 올라갈 것이라. 두 번의 제안에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던 이완이 이번에는 대답이 즉시 나온다. 낙심하고 허탈하여 나온 말이 이렇다.

”사대부들이 모두 예법을 지키거늘 누가 머리 깎고 오랑캐 옷을 입으려 하겠습니까?“


일부러 찾아와 싫다고 해도 질문을 하여 마지못해 대답하도록 강요를 한 주제에 이것도 못한다 저것도 못한다 하니뭣하러 온 것이냐! 허생이 머리끝까지 분노하여 대갈일성하였다.

”사대부가 뭐 하는 것들이냐? 오랑캐 땅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칭 사대부라고 뽐내니. 어리석기가 그지없다. 흰옷만 입으니 이는 상주들의 상복(喪服)이고 뾰족하게 묶은 송곳 머리는 남쪽 오랑캐의 방망이 상투이거늘, 그게 무슨 놈의 예법이냐?“


그러면서 허생은 번오기와 무령왕의 예를 든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장군인 번오기는 진시황에게 죄를 얻어 망명했다. 태자 단과 형가가 찾아와 진시황을 암살하려면 그의 목이 필요하다고 하자 번오기는 기꺼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번오기는 복수를 위해 목을 아끼지 않았는데 너희는 대의를 위한다면서 상투를 아끼느냐? 또한 전국시대 조나라의 무령왕은 호복기사를 받아들였다. 말을 달리며(기 騎) 활을 쏘려면(사 射) 말타기에 적합한 바지(호복 胡服)을 입어야 한다. 이를 도입하니 나라는 전국칠웅의 반열에 올랐다. 부국강병을 위해서라면 오랑캐 옷을 못 입겠느냐, 명나라를 위해 복수한다면서 소매가 너풀거리는 옷을 입고 말 달리며 무기를 쓰겠느냐?


허생은 칼을 찾는다. 금방이라도 이완의 목을 벨 기세다. 이완이 깜짝 놀라 뒷문으로 뛰쳐나가 재빠르게 달아났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 했다. 어물어물 뭔 말인가를 한 것 같기는 하다. 공연한 일을 벌여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고 했던가. 다음날 찾아가 보니 집은 텅 비었고 허생은 이미 사라졌다. 평생에 얻기 힘든 친구를, 그나마 곁에 있을 때는 내가 보살폈건만 공연한 일을 벌여 등 떠밀어 쫓았구나.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허생이 사라져야 할 이유를 알겠다. 허생이여, 그대에게는 조선이 너무 좁았던 게로구나. 그래도 그렇지, 만 냥으로 백만 냥을 만든 계략도 다 전수하지 않고 가버리니,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만둔 돈 공부를 시작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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