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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Oct 30. 2024

16. 머리를 자르느냐 머리카락을 자르느냐

머리카락을 일정 길이만큼 유지해야 하는 시대가 있었다. 남자는 몇 센티미터 이상 길면 안 되고 여자는 몇 센티미터 이하로 짧으면 안 되었다. 그 시대를 지나 내 마음대로 깎든지 말든지 하는 시대가 왔다. 그 시대를 지나 지금은 남자도 얼마든지 머리를 길러 묶고 땋으며 여자도 얼마든지 까까머리로 멋진 패션을 연출하는 시대가 왔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이의 앞가슴을 쳐다봐야만 남자인 줄 안다던지 대중목욕탕 여탕에 짧은 머리카락으로 들어서는 이를 남자로 오인하여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도 생겼다. 지금도 아이는 교과서의 그림대로 짧은 머리카락의 아빠와 긴 머리카락의 엄마를 그리지만, 정작 그 애의 아빠는 가수 김경호처럼 윤기가 흐르는 장발을 찰랑거리기도 한다.


예전 우리 조상들에게도 머리카락이 말썽이 된 적이 있다. 멀리는 원나라, 조금 더 가까이는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생긴 일들이다. 원나라는 몽골족이, 청나라는 만주족 즉 둘 다 한족이 아닌 오랑캐가 세운 중국왕조다. 이들의 공통점은 수렵 유목민이라는 것이다. 유목민은 야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철제 투구를 쓰면 땀이 차고 머리가 열을 받는다. 좀 더 편리하게 야외 활동을 하려면 머리카락을 밀어야 한다. 이것이 변발이다. 변발하는 이들은 대체로 사막이나 광야처럼 물이 부족한 지역에서 살았다. 그나마 부족한 물을 알뜰하게 아껴 쓰기 위해 변발을 한 것이다. 더 건조한 화북지역에 사는 한족들이 화남의 한족에 비해 변발을 더 빠르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청나라는 초기에 점령하는 지역마다 변발령을 내렸다. 한족들이 서로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남자라면 열흘 이내에 머리를 깎고 변발을 해야 했다.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즉시 참수되었다. 머리카락을 남기면 머리가 날아가고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카락을 밀어야 했다. 변발하지 않은 자는 새벽에 잡혀 오면 해뜨기 전에, 저녁에 잡혀 오면 해지기 전에 처형을 당했다. 변발령을 집행하는 관리는 변발 도구와 함께 변발에 저항하다가 잘린 자들의 수급을 다발로 엮어 가져왔다, 범법자(?)가 나오는 고을의 관리도 한 묶음으로 처벌당했다.


자존심 강한 한족들은 이 오랑캐의 풍습을 따르기가 싫었다. 머리카락을 강제로 깎는 모욕 형벌도 있을 정도였다. 머리에 칼을 대는 짓은 부모가 물려주신 "신체발부”를 훼손하는 불효 행위였다. 부모의 상을 치르는 동안에나 머리를 길러 상중(喪中)임을 표시했다. 머리카락을 깎기 싫은 자는 승려가 되거나 깊은 산속으로 옮겨 숨어 살아야 했다. 화남지역인 양쯔강 이남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발했다. 가정성의 경우, 연속 세 번으로 봉기를 일으켰는데, 그걸 진압하는 과정에서 가정성과 인근 지역 한족들의 씨를 말리게 되었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청나라 황제가 조선에게만큼은 두발 자유화(?)를 허용한 것이다. 


청나라와 조선이 맞붙은 병자호란은 인조임금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두 나라는 정축년(1637년)에 약조를 맺었다. 조선이 명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청나라와 군신(君臣)관계를 맺는 것이 그 주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별별 치욕적인 조건들이 나열된 가운데에도 변발에 관한 사항은 없었다. 한족들에게는 극성맞게 변발을 강요하던 청나라 황제가 조선에게는 청나라식(式) 헤어스타일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미 당할 만큼 당한 한족 관료들이 여러 번이나 조선인들더러 머리를 깎도록 명령하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청나라 황제는 그 제안에 응하지 않으면서는 가만히 여러 패륵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고 한다. 


“조선은 본래 예의의 나라라고 불리니, 그들은 머리칼을 아끼는 것을 자신의 목을 아끼는 것보다 더 심하게 한다. 지금 만약 그들의 사정을 무시하고 강제로 깎게 한다면 우리 군대가 철수한 뒤에 반드시 본래의 상태로 되돌릴 것이니, 차라리 그 풍속을 따르도록 하여 예의에 속박시켜 버리는 것만 못할 것이다. 저들이 도리어 우리 풍속을 익힌다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데 편리해질 것이니 그건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비운을 만나 천하 사람이 죄다 되놈이 되어 버렸지만, 조선 땅 한모퉁이가 겨우 그 수치를 면했으니 조선은 문약(文弱)한 대로 머물러 좋고 청나라는 조선을 손쉽게 지배할 수 있어 안성맞춤인 정책이었다.


연암은 이 부분을 살짝 비틀어 놓는다. 중국의 장관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선의 일등 선비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무것도 볼만한 것이 없었다. 왜냐 하면 황제와 대신 그리고 만백성이 모두 변발을 했으니 말이다. 사람이 생겨난 이래 머리 깎고 변발한 천자는 없었다. 한번 머리를 깎고 변발을 했다면 이건 되놈이다. 되놈이라면 개, 돼지 같은 짐승이니 개, 돼지에게서 무슨 볼만한 것을 찾겠는가.” 듣는 사람이 입을 다물고 숙연하여 찍소리도 내지 못하는, 으뜸 의리의 말이다. 얼핏 들으면 머릿속에 있는 두뇌보다 그 두뇌를 감싸고 있는 머리카락이 더 중요하다는 말처럼 들린다. 


<허생전>에서 허생은 이완대장에게 북벌의 계책 세 번째를 제안한다. 명문가 자제를 선발하여 변발을 시켜 오랑캐의 옷을 입히며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게 만들자고 했다. 다른 두 가지 제안에는 한참 동안 난처해 하던 이완 대장이 이제는 낙심하고 허탈하여 즉답을 한다. ‘예법을 지키는 사대부가 기꺼이 머리를 깎고 오랑캐 옷을 입겠느냐’고. 허생은 대갈일성한다. ‘송곳처럼 뾰족하게 묶은 머리는 남쪽 오랑캐의 방망이 상투이지 그게 무슨 예법이냐’고. ‘번오기는 사적인 원한을 갚기 위하여 제 머리를 아끼지 않았거늘 명나라의 복수를 위해 머리털 하나를 아끼느냐’고 한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 탁오 이지는 요즘의 아토피처럼 피부병이 있어 아예 드러내놓고 삭발했다. 꼭 승려가 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해도 그 삭발은 그의 성질이 못돼먹은 탓으로 받아들여졌다. 연암조차도 그의 삭발을 중국이 장차 머리를 깎고 변발을 하게 될 조짐으로 여겼으니 말이다. 지금의 변발 제도를 버리고 다시 복고적인 헤어스타일로 돌아간다 해도 백여 년이 흘러 풍습이 변했으니 도리어 번거로운 일이 되리라고 연암은 전망한다. 틀림없다. 연암은 MBTI에서 N이다. 미래의 우리 시대를 미리 엿보았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는 충격의 하나는 단발령이다. 땅을 치고 통곡하고 머리카락을 끊는 대신 목숨을 끊는 사람이 숙출하는가 하면 최명희의 소설 <혼불>에서는 상놈들이 머리를 깎아 시원하고 홀가분하다고 기뻐하고 있었다. 조선 사대부들에 의해 착취당하느니보다 일본의 착취를 당하는 쪽이 더 가벼웠던 가엾은 민초들의 목소리였다. 머리카락을 가지고 엎치락 뒷치락 몸부림을 하던 20세기가 가고 21세기가 왔다. 우리는 안다. 삶의 질이라는 면에서는 어쩌면 두뇌보다도 두뇌를 감싸는 머리카락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특히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져본 이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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