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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Oct 30. 2024

15. 묵(자)알못인 나에게도

-묵자(墨子. B.C 480~ B.C 390년)

연암은 광피사표패루에서 터지는 웃음 소리를 듣습니다. 여기는 열하입니다. 건륭제의 만수절 축제를 기념하는 공연을 하느라 다들 연습에 여념이 없습니다. 천하의 기이한 재주와 음란한 장난과 잡스러운 연극 패들입니다. 잔재주를 부려 사람의 눈을 속이는 것이 요술입니다. 이런 요술은 예전부터 있어 왔지요. 연암은 잡스러운 요술 이야기를 하는 듯 하더니 어느새 '군자라고 할 수 있는 묵적도 나무로 만든 솔개를 날렸다'고 슬쩍 삼천포로 빠집니다. 존칭을 생략하고 그냥 ‘묵적’이라고 부르면서도 ‘군자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요.  

    

묵적은 춘추전국시대 사람으로 송나라 출신입니다. 제자백가 중의 하나인 묵가의 대표이기 때문에 존칭의 뜻을 담아 묵자라고 불립니다. 그의 핵심 사상은 겸애(兼愛)입니다. 겸애란 서로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하면 하늘의 뜻과 일치하여 평화로워진다는 주장입니다. 까마득한 그 옛날에 기독교 사상에 가장 비슷한 사상이었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내가 학창시절에 배운 대로입니다. 그런데 열하일기를 읽으며 연암의 ‘묵적’ 이야기를 좀 더 검색한 결과 그의 주장-비공(非攻) 비유(非儒) 비악(非樂)을 찾아냈습니다.    


먼저 비공(非攻)이란 전쟁을 반대하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기만 한다면, 자신이 다치는 것을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추구하겠다는 겁니다. 묵자는 송나라를 공격하려고 준비하는 초나라에 달려갔습니다. 그 초나라에서 전쟁 모의 게임을 아홉 번이나 하여 상대를 눌렀습니다. 바짝 약이 오른 상대의 위협을 받았지만 묵자는 자기의 제자들이 송나라 군대를 훈련하고 있으니 자기를 죽여도 소용없다고 대꾸했습니다. 고생고생하며 초나라까지 간 것이 헛되지 않아 전쟁이 불발되었습니다. 이것만 가지고도 묵자는 공자와 노자조차도 비교할 수 없이 적극적인 수준으로 선을 추구한 성인입니다.      


비유(非儒)란 유교의 허례허식을 비판하고 의례 간소화를 주장한 것입니다. 묵자 자신도 풀로 이은 지붕에 서까래도 가지런하지 않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흙 그릇에 거친 곡식을 담아 먹고 거친 옷을 입으며 세 치 두께의 나무관으로 애곡을 자제하며 장례를 치렀습니다. 화려한 장례식은 세금을 과하게 걷어 백성을 괴롭히니까 반대했습니다. 특히 ‘삼년상(三年喪)’은 비생산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삼 년이나 남편이 돈을 안 벌면 가족은 어떻게 먹고 사나요? 완전 금수저의 로망 아닙니까? 삼년상을 못 지키면 관직에서 밀려나는 불이익까지 줬다니 말입니다.     


비악(非樂)의 주장을 듣고는 속담 하나가 떠올랐니다. 집안이 빨리 망하려면 중병에 걸리고 천천히 망하려면 예술을 하라는 겁니다. 그만큼 도달하기에 힘들고 돈 많이 드는 일이 예술이지요. 묵자 자신도 귀가 음악의 즐거움을 모르지 않지만 세금을 거둬 종과 북과 거문고를 만들면 백성의 이익에 보탬이 안 된다고 반대했습니다. 이때의 음악은 삼년상만큼이나 금수저들의 로망이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도 음악(예술)이 가장 꽃피우던 시절은 종교가 부패하고 정치가 혼란스러웠습니다. 음악을 잘 아는 황제들이 정치를 말아먹었음을 연암은 슬쩍 지적합니다.        


시대별로 보아 묵자도 공자에게서 직접 배웠을 터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대놓고 유가를 비판하면 듣는 사람은 통쾌합니다만 성리학 외에는 다 이단이라고 내치던 조선 유학자들을 의식면서는 연암도 감히 묵자를 묵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구리 불상 하나만 가지고도 발칵 뒤집혔거늘, 묵자라고 불렀다가는 뭔 소리를 들을라고! 그러고 보니 공자든 맹자든 형편은 궁핍했으나 명문가의 피를 이어 금수저 출신인 반면 부모의 다정한 사랑도 못 받고 컸다는 묵자는 농민이거나 하층민 곧 흙수저였을 거라고 합니다. 아마도 목수 출신이었던지, 기계를 탁월하게 제작하며 이동식 바퀴가 달린 구름 사다리까지 설계했답니다.      


한번은 묵자가 나무 솔개를 하늘로 날려 보냅니다. 3년이나 걸려 만들어낸 걸작품입니다. 한번쯤은 동심이 발동해 만들기는 했지만, 묵자는 스스로 그 나무 솔개를 수레보다 못하다고 깎아내립니다. 하루치 품으로 짐 삼십 석을 실어 나르는 수레를 만드는 게 훨씬 낫다는 거죠. 묵자 자신도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백성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도 마다하는 묵자, 멋집니다. 오늘날 묵알못인 나에게이런 좋은 친구(?)를 소개해준 연암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열하일기를 읽습니다.(연암이 청나라의 선진 기술을 배우자고 할 때는 꼭 묵자를 염두에 둔 것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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