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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Nov 01. 2024

17. 제자들이 안 세운 서원은 어디?

-옥천서원 이사룡(李士龍:1613~1641) 

 전남 장성에는 상무대가 있습니다. 상무대에 다섯 개의 학교가 있다는 거 아세요? 육군 병과 학교 다섯 개는 육군보병학교와 육군포병학교, 육군기계화학교와 육군화생방학교, 그리고 육군공병학교입니다. 연 교육인원이 33,000여명이라고 해요. 여기에는 육군 소위로 교육을 받은 내 아들도 포함됩니다. 아들의 병과는 포병이니 포병학교 출신이네요. 아들은 전방에서 근무했을 때 군대 경험이 없는 애미에게 탱크나 대포 등을 가리키며 저게 1억짜리라느니 몸값(?) 위주로 소개하기도 했답니다.      


 전남 장성에는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는 필암서원이 있고 경북 안동에는 퇴계 이황을 배향하는 도산서원이 있습니다. 그러면 성주 옥천서원(星州 玉川書院)에서는 누구를 배향하는지 아시나요? 옥천서원도 생소하고 이 서원에서 모시는 인물 이사룡도 못지않게 생소합니다. 필암서원을 김인후가 세운 거 아니고 도산서원을 이황이 세운 게 아니지요. 서원이란 일차적으로 제자들이 그 스승을 존경하여 추모하기 위해 세우며 스승들은 주로 유학자들입니다. 하지만 옥천서원만큼은 일반 양민들이 똑같은 양민을 기리기 위해 십시일반으로 설립한 곳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기림을 받는 이사룡은 누구인가요?  

    

이사룡은 성주군 비호석 작촌의 양민이었습니다. 양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효도와 근신으로 인근에 이름이 알려졌다고 합니다. 숭정 11년(1638년)에 금주에서 명나라와 격돌한 청이 조선의 병력을 요청해 왔답니다. 인조 임금은 어쩔 수 없이 병사를 징집하는데 이때 이사룡도 징집되었습니다. 남의 전쟁에 동원되어야 하는 병사들을 위해 송별연이 마련되었으나 이사룡은 ‘오랑캐를 도와 천자의 나라를 친다는 것이 의리에 맞지않다’며 응하지 않았습니다. 1641년 2월 20일 징집된 오천 명을 거느리고 장수 이시영이 한양을 출발했습니다. 한 달을 걸려 심양에 도착하고 3월 24일에 전쟁터인 금주에 도착했습니다. 4월 초에 조선 병사들은 청군의 선봉에 세워집니다.      


조선 병사들은 정밀한 총으로 명나라의 병사를 많이 죽였습니다. 명나라의 장수 조대수는, 청나라 병사의 머리에 은 오십 냥, 조선 병사의 머리에 은 일백 냥의 상금을 걸었습니다. 발포하여 명나라 병사를 맞추면 상을 주겠다고 청나라 군대에서도 맞대응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룡은 탄환을 주머니 속에 넣은 채 공포(空砲)만 쏘았습니다. 곁의 동료가 말렸지만, 그는 조선의 그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을 홀로 하고 있었습니다. 힘에 밀려 억지로 나왔으나 명나라를 상대로 싸우고 싶지 않다는 본심을 이렇게라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세 번을 쏘았지만 아무도 상하지 않았지요. 그의 빈총 발사는 곧 발각됩니다.      


감독관이 공포를 쏜 이유를 물었을 때, 이 사룡은, "명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로 섬기기 때문에 실탄을 쏠 수 없다'고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감독관은 화를 내며 나무랐지만, 이사룡은 오히려 감독관을 나무랐습니다. “명과 조선은 군신과 부자 관계이니, 자식더러 아비를 죽이라면 따르겠는가.”라고. 감독관은 그의 뜻을 꺾기 위해 고문을 가했지만, 이사룡은 빨리 죽이라고 오히려 큰소리쳤다고 합니다. 동료인 조선 병사들도 설득했지만, 이사룡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사룡은 향년 47세에 참수(斬首)당합니다. 그가 형장에 끌려갈 때 온 군대가 다 같이 “의사(義士)! 의사!”라고 외쳤습니다.      


청나라 장수는 이사룡의 목을 베어 조리를 돌렸습니다. 이사룡을 망신 시키는 게 목적이었으나, 명나라 군대가 그 모습을 멀리에서 바라보고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마지못해 전투에 참가한 조선 군사들도 속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대수는 ‘대명충신(大明忠臣) 조선의사(朝鮮義士)’라고 써서 장대에 내걸었습니다. '이시영의 조선 병사들아, 너희가 어찌 이사룡의 죽음을 헛되이 하느냐. 명나라의 은혜를 갚기 위해 목숨을 건 의인도 있지 않느냐.' 핏빛으로 물든 글자는 조선 병사들의 투지를 꺾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집으로 돌아가더라도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무덤까지 품고 가야만 했습니다.     


당시 소현세자도 금주에 와있었습니다. 조선군을 독려하기 위해 동원된 걸음이었지요. 청나라 장수가 이사룡의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그 시신을 소현세자에게 보냅니다. 세자는 이사룡을 염습하고 관을 만들었습니다. 수령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여 조선의 작촌마을까지 그의 시신을 운구하게 했습니다. 일단 조선 국경 안에서 운구가 시작되자 인조 임금은 상여가 지나가는 도의 방백들에게 운구에 어려움이 없도록 특명을 내렸습니다. 건강하게 떠난 아들이 목이 잘린 시신으로 돌아왔으니 이사룡의 가족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후에나마 조선의 세자가 직접 늦봄의 후텁지근한 날씨를 무릅쓰고 냄새나는 시신을 수습해준 영광은 꿈도 꾼 적 없었습니다. 자기의 마을에 고이 잠든 이사룡은 이후 의인으로 불렸습니다.     


이사룡이 죽은 그해의 8월에, 인조임금은 이사룡에게 합당한 포상과 제사를 챙기도록 지시했습니다. 1662년(현종3) 진휼어사는 이사룡의 부인 이씨에게 쌀 10섬을 내리고 이듬해 그 아들 선(善)에게 벼슬을 내리도록 상주했습니다. 1668년(현종 9)에 이사룡의 아들에게 관직이 내렸으며, 1793년(정조 17)에 이사룡은 성주 목사로 추증됩니다. 1692년(숙종 18)에 성주 목사와 성주 군민들이 함께 작촌에 추모의 장소를 세웁니다. 바로 충렬사입니다. 이후 1796년(정조 20)에 충렬사는 옥천서원으로 사액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의 손으로 훼철된 이후 다시 세워집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복한 후 명나라의 충신들에게 시호를 내렸습니다. 문천상을 비롯하여 많은 명나라 충신들이 청나라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충절과 공로를 존중하는 동시에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통치하기 위한 유화책이었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사룡은 어지간한 명나라 충신들에 비해 높이 평가받을 만하여 청나라 황제가 들었다면 특별히 시호를 주었을 것이라고 연암은 평했습니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 관문인 산해관에 이사룡을 기리는 표석이 있을 만큼 이사룡의 절의는 후대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때마침 송산을 지나던 연암이 그를 기억하여 글을 지어 조문했답니다. 


장성에는 봉암서원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망암 변이중을 배향합니다. 변이중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에 병력과 군량, 무기를 모집하고 수송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왜군의 조총에 맞설 무기로 화차 3백대를 제작한 국방과학의 선구자였습니다. 변이중은 그 중의 40대를 행주산성의 권율에게 보냅니다. 그 결과 권율은 적은 병력으로 왜군을 무찔러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했습니다. 봉암서원에서는 화차전시관(체험관)을 세워 변이중의 충의를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옥천서원과는 무슨 교류가 있었을까요? 이사룡도 병과가 포병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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