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의 말은 으레 과하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뒤늦게서야 그게 자주색의 월따말인 것을 발견했다. 6월 24일 일기에서 봤으니, 새삼스럽다. 그러고도 어째서인지 월따말을 ‘왈따말’로 오독한 나는 인터넷 검색창에다 ‘왈따말이 과하마인가요?’라고 쳤다. AI는 떡하니 ‘왈따말은 과하마입니다. 왈따말은 특정한 언어나 사회적 맥락에서 과하게 사용되는 말이나 표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말들은 종종 유머나 특정 그룹 간의 소속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ㅋㅋㅋ"는 웃음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왈따말입니다.’라고 대답한다. 황당하여 책을 거듭 확인하니 그제야 ‘왈’ 아닌 ‘월’이 눈에 들어온다. 어쩐지 그런 말 없다고들 하더니만, 제대로 ‘월따말’로 검색하니 그제야 제대로 답을 내어준다.
우여곡절 끝에 제대로 알게 된 이, 이마가 희고 정강이는 날씬하고 발굽은 높고 머리는 뾰족하며 허리는 짧고 두 귀는 쫑긋 세운, 월따말은 과연 과하마였을까 아니었을까. 과하마는 주몽도 즐겨 탔다고 전해지는 조랑말이다. 말을 타고 과일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다는 뜻으로 ‘과하마(果下馬)’라고 부른단다. 어쩐지 작고 귀엽게 느껴지는 것이 요즈음 아이들에게 승마를 가르치는 용도로 쓰는 걸 봤기 때문일 것이다. 키가 삼 척(尺)을 넘지 않는다니 90cm보다 약간 더 큰 키다. 체구가 장대하고 키가 큰 연암이 탔다면 여지없이 발이 땅에 질질 끌렸을 것이다. 그 몸집을 감당하는 적토마를 타고, 덩달아 만 리를 뛰고 싶도록 부풀고 설레는 마음으로 연암은 자기의 말이 만 리를 뛰어갈 모습을 갖췄다고 쓰고 있다. 만 리를 운운하며 이왕에 적토마도 탔겠다, 청룡언월도만 치켜들면 그대로 관운장이 될 터이다.
그 적토마 앞에서 마부 창대가 경마( 牽:끌 견 馬:말 마)를 잡는다. 만 리를 달릴 말의 고삐를 틀어쥐고 걷는 것이다. 처음에는 연암이 말을 탈 줄 모르는 줄 알았다. 나중에 보니 소낙비를 피해 채찍으로 말을 급히 몰고 또 혼자 말에서 내리기도 한다. 얼마든지 말을 다룰 줄 알고 탈 줄 안다. 그런 연암에게 왜 경마를 잡아줘야 하는가. 속담에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고 말 타면 종 두고 싶다’고 했다. ‘경마’란 말의 고삐를 잡는다는 뜻으로 ‘경마 잡히다’란 고삐를 잡고 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냥 걸어가기보다 말을 타고 가는 게, 또 말을 타고 가더라도 혼자보다는 하인을 거느리고 가는 게 훨씬 낫다는 뜻이다. 요즘 말로 바꾸면 양반 체면에 자가용을 직접 모는 건 채신머리없는 일이니, 자가용 운전은 모름지기 기사에게 시켜야 한다는 식이다. 희극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이게 왜 웃기는 일인지 이해가 안 되면 청룡언월도를 치켜든, 경마를 잡힌 관운장을 상상해보라!
만 리를 달릴 수 있는 말에게 삼천리밖에 안되는 조선은 제대로 달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 정조가 다스리는 조선 르네상스의 시대에서도, 한반도는 성리학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굳게 닫히고 잠겨, 세계 속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기를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연암으로서는 천 년에 한번 올 기회라고 여기고 나섰던 열하 여행도 건륭제에게는 그냥 400리 길, 이틀 거리의 나들이다. 그 정도는 집 앞 뜰에 나다니는 격이란다. 황제가 그런다면 그런 거지 누가 뭐라고 하겠나. 만 리를 달리고 싶던 적토마는 고삐를 벗어 던지고 바람처럼 질주한다. 임금의 품조차 답답하여 밖으로만 맴돌던 연암이 열하까지 원없이 무박나흘을 달린다. 그 말발굽소리가, 비좁고 아늑한 어항 속에서 금붕어처럼 노니는 나의 귓전을 스치며 메아리친다. 가자. 언젠가 가자.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중국으로. 그 열하일기 길을 밟아보자꾸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