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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의 Apr 05. 2024

5. 고려보

-최명희의 『혼불』과 함께

  연암은 조선 사신단의 중국 여행에 수행인 자격으로 동행한다. 여정은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국경인 책문(柵門)을 통과하여 연경(=북경)까지 한 달 남짓 걸려 가게 되어 있다. 연암 일행은 연경에 도착하기 이틀 전쯤 고려보 마을에 닿는다. 집집마다 지붕에 띠 이엉을 얹어 초가집 비슷한 집들이 마을을 이룬 곳이다. 병자호란 당시에 잡혀 온 조선인 포로들이 모여 살고 있는 박씨 집성촌이다. 그들은 무논이 없는 요등 천여 리 허허벌판에 벼를 심어 논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떡이나 엿 같은 음식을 먹는 등 조선의 풍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는 글에 나는 최명희의 소설 『혼불』을 문득 떠올렸다.

      

  1994년 최명희는 중국에 취재하러 갔다. 그녀 역시 연암처럼 찌는 듯이 더운 한여름 7월에 64일 동안 대륙을 돌아다녔다. 처녀의 몸으로 혼자 다니며 이목이 쏠리지 않도록 중국 옷까지 입었다. 최명희는 소설 『혼불』의 중요 무대인 북경과 연변, 요녕성의 봉천(심양)과 흑룡강성의 목단강까지 다니며 애정하는 취재수첩에 깨알같은 글씨로 메모를 적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설 『혼불』에는 타국에서조차 고국의 말과 문화를 잃지 않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썼다. 만주 일대에서는 논 만들기가 금기였지만, 조선 사람들에게만큼은 묵인해 줬다고 한다. 포로로 끌려와 온갖 고초를 다 겪었건만, 기어이 논을 만들고 쌀을 재배하여 만든 그 떡이 ‘고려병(高麗餠)’이다.


  조선 사신단이 이곳을 지날 때면 고려병을 사 먹으며 그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18세기 초반만 해도 고려보 사람들은 사신단을 반갑게 맞이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고려의 자손’을 자처하며 고국 이야기 끝에 눈물을 흘리고 떡값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8세기 중반을 넘어 1765년 홍대용의 시대에 이르면 분위기가 딴판이 된다. 사신단 일행이 술과 고기를 토색하고 따로 그릇이며 의복 등을 요구하고, 주인이 조국의 옛정을 생각하여 엄히 지키지 않는 틈을 타서 훔쳐가기까지 하더라는 것이다. 


  이에 고려보 사람들은 사신단 일행이 지날 때마다 술과 음식을 감추고 팔지 않았는데, 간곡히 청하면 그제야 팔되 비싼 값을 달라고 하거나 돈을 먼저 받았다고 한다. 그럴수록 사신단 일행은 온갖 꾀로 속여 분풀이를 하니 서로 원수 보듯 하게 되었다. 사신단은 고려보에 도착하면 일제히 한목소리로 욕지거리를 했다고 한다. “너희는 조선 사람의 자손이 아니냐? 너희 할아비가 지나가시는데 어찌 나와서 절하지 않느냐?”고. 그러면 고려보 사람들 역시 욕설을 마주 퍼부었다는 것이다. 


  64일이나 중국에 머물러 많은 것을 보고 들었겠지만, 최명희의 시선은 우리의 말과 문화를 보존하는 것에만 머물러 있다. 가령 보자기에 겹겹으로 싸서 보관한 찌그러진 갓과 녹슨 놋숟가락 하나다. 고려보 촌장의 조상이 그곳으로 붙잡혀 올 때 지니고 온 물건이다. 조상이 가져온 물건들을 후손들도 여전히 소중하게 몇백 년 동안 보관해 왔다. 조선 사람의 징표라는 이 스토리텔링이 없었다면 그냥 내다버릴 그 낡은 갓과 숟가락에 마치 귀신이라도 붙은 듯 '나라면 무엇을 남겨야 할 것인가'를 절로 생각하도록 이끌어가는 최명희의 필력이 대단했다. 


  최명희의 시선이 마냥 따뜻하게만 머물러 있는 그 고려보에 하룻밤이나 묵었을 연암에게는 다른 면 즉 고려보 사람들과 조선 사람들과의 관계가 보인다. 욕설과 야유를 주고받는 상황을 직접 목격했다면 민망한 나머지 동행들을 말리느라 바빴을 연암이다. 원치도 않는 전쟁에 말려들어 동포가 나뉘어 살게 된 비극은 까맣게 잊고, ‘이곳 풍속이 매우 나쁘다’ 고 비난하는 이들을 일러 ‘한심하다’고 연암은 탄식한다. 남을 탓하기는 쉽고 자기자신을 돌아보고 고치는 건 어려운 법이라 어떤 개혁을 시도하더라도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그 증거로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재진행 중이다. 연암의 싸움은 21세기에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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